"내가 무슨 죄가 많아서... "
엄마는 미혼의 딸이 새해를 맞아 한 살을 더 먹는 것이 못내 속상한 모양이었다. 결혼하지 않은 주체는 딸인데, 그 결과가 자신의 죄 탓인양 어쩔 줄을 몰라 했다. 21세기 트렌드, 혹은 미래 트렌드의 대세로 떠오른 '핫한' 1인 가구의 중심에 딸이 있는데, 엄마는 엄마 세대의 트렌드로 딸을 이해하려 했다. 변명이 아니라 진짜로,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그 정도로 마음이 끌리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고, 결혼 자체에 대해 조급함이 없었고,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 아니라 나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 엄마의 조바심도 이해하지만 확신 없는 길을 나이 때문에 무작정 들어서기는 더더욱 자신이 없었다.
이제는 제법 단단하게 발딛고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이 들었을 때. 그래서 결혼을 해도 적어도 나 자신 때문에 흔들리지는 않고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나를 닮은 존재가 세상에 있어도 부끄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 때가 왔을 때 나는 이미 혼기가 꽉 차고도 넘쳐 있었다. 어쩌다 실수로 결혼정보회사의 전화를 받게 되면 커플매니저들은 나이를 지적하며 조급함을 유도했다. 학력과 직업과 재산과 나이와 외모와 연봉으로 완벽하게 등급을 나눠 놓은 그 세계는 친절하고도 냉정한 방식으로 계층 이동의 불가능을 역설했다. VIP 등급에 속한다는 명목으로 가산금을 주장했지만 실상은 희박한 가능성에 절박하게 매달리는 사람들의 심리를 활용한 웃돈일 뿐이었다. 기회비용을 따져보면 지불할 의사도 의욕도 상실되는 금액이었다. 거액을 지불한다 해도 실제 시장에서는 상대가 원하는 등가교환의 매개가 있어야 했고, 교환가치가 없다면 거래는 성사될 수 없었다.
따라서 이 '정직한' 물물교환의 시장은 사람들의 간절함과 이기심과 자괴감을 먹고 급속도로 자라났다. 간혹 소개팅이나 선과 같은 자리에 나가게 되면 완벽한 상품으로 평가받는 나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상대방이 느끼기에는 나 역시 마찬가지의 자세였을지 모른다. 나이가 차서 대면하는 만남이란 마치 홈쇼핑에서 쇼호스트가 설명해 놓은 제품에 대해 직접 검증하러 나온 자리 같기도 했다. 생각보다 별로라면 실망해서 사지 않고, 생각보다 괜찮으면 다른 구매자가 나타난다던가 구매를 거부당한다던가 하게 되는. 거절이나 혹평을 피하려면 서로가 자신을 열심히 설명해야 했다. 설명을 한 쪽도 들은 쪽도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설명하지 않아도 나를 알아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소꿉친구라던가 옛 동창이라던가 동네 오빠라던가. 그러나 드라마에서는 흔하게 발생하는 일들이 현실에서는 쉽지 않았다.
연애로 만난 첫 남자친구와 결혼한 엄마는 소개팅의 매커니즘과 정신적 피로감을 이해하지 못했다. 차라리 그 시간과 비용으로 자기계발을 하거나 여행을 하는 것이 낫다는 주장을 납득하지 못했다. 엄마 친구들은 다 맞선으로 결혼했지만 잘 살고 있으며, 여러 사람을 만나 보아야 사람 보는 눈도 생긴다는 것이었다. 딸이 독신주의자인 것도 아니고 어쩌다 보니 나이를 먹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땅을 치고 후회되는 옛 연인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혼자 노는 사람들이 많아지며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많아져 심심할 틈도 없었다. 그저 흔한 사회 현상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존재일 뿐이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좌절할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가계의 평균을 '1인 가구' 가 아닌 '4인 가구'로 믿고 있는 엄마에게 딸은 해결하지 못한 과제물과도 같았다.
그러나 결혼에 대한 엄마의 인식에는 모순이 있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는 내가 무슨 죄가 많아서 느이 아빠같은 사람과 사는지 모르겠다며 혀를 끌끌 차다가도, 갑자기 이번에는 또 내가 무슨 죄가 많아서 네가 아직도 시집을 못 갔는지 모르겠다며 한탄을 하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허점을 지적하는 순간 대화는 잔소리로 변환되므로 잠자코 있어야 한다. 할 때가 되면 어련히 할 텐데, 엄마의 죄로 인한 결과도 엄마에게 내려진 벌도 아닌데, 죄와 벌의 논리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엄마는 자꾸 무엇을 잘못했나 고심했다. 고심하는 엄마를 보며 딸은 역시 내가 뭘 잘못해서 엄마를 이렇게 걱정시키나 고심했다. 마치 고심의 무한반복과도 같았다.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화려한 싱글라이프는 아니지만 이만하면 궁상맞거나 쓸쓸하지는 않은 삶이라고 생각했다. 이십 대 후반에는 빨리 결혼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나기도 했다. 그러나 원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고, 소개팅이며 선의 빈도가 줄어갔다. 수긍과 체념과 그 사이의 어디쯤에서 결혼에 대한 니즈(needs)는 점점 약해졌다. 배우자의 존재가 아쉬울 때는 이를테면 이런 순간들이었다. 맛집에서 2인 이상만 주문되는 메뉴가 먹고 싶을 때, 원피스 등 뒤의 지퍼를 혼자 올리거나 내리기가 힘들 때, 분리수거하러 갈 때 손이 부족해 두 번을 오르락 내리락 해야 할 때, 동반자 1인까지 무료인 통신사의 영화 예매 혜택을 매번 지나쳐야 할 때. 그러나 이를 위해 연애나 결혼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딸에게는 언제든 이야기를 들어주고 맞장구를 쳐주고 맛집을 함께 갈 수 있는 절친인 엄마가 있었다. 딸이 생각하는 결혼이란 '약속을 잡지 않아도 항상 같이 놀 수 있는 절친이 있다는 것' 이 핵심이었는데 우리 사회가 원하는 결혼이란 훨씬 복잡다단한 일들을 요구했다. 아내와 며느리와 엄마의 역할을 하며 직장까지 다니는 삶은 존경심을 불러일으켰다. 회사를 다니며 엄마가 내게 했던 것처럼 내 아이에게 해 줄 수 있을까 고민이 되기도 했고, 육아 스트레스나 가정 내의 갈등으로 고통을 겪는 지인들을 보면 겁이 나기도 했다. 대학 입시나 취업을 앞두었을 때와 비슷한 일이 결혼에도 적용된다. 미혼일 때에는 결혼만 하면 될 것 같지만 막상 결혼을 하고 나면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가 줄줄이 발생한다. 그 때가 되면 '결혼만 하면 다 해결될 것 같았던 과거의 그 때'가 그리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엄마가 "내가 무슨 죄가 많아서..." 로 시작되는 푸념을 시작할 때 이상하게도 조금은 안심이 된다. 그렇게 말하는 엄마의 속내는 엄마의 결혼 생활 40년을 돌아보았을 때, 적어도 벌을 받는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여기에는 아들과 딸의 존재가 제법 큰 몫을 차지하고 있을 거라는, 근거있는 자신감 덕분이다. 엄마의 결혼으로 인한 결과물을 셈해 보자면 대단한 재물이 남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귀영화는 누리지 못했어도 소소한 행복은 아쉽지 않게 누렸다는 반증이리라. 아마도 엄마의 결혼생활이나 자녀들의 성장 과정을 돌아보았을 때 적어도 결혼을 하는 쪽이 아닌 결혼을 하지 않는 쪽이 더 '죄'로 느껴진다는 이야기일 것이리라. 딸의 존재로 인해 엄마가 아주 큰 상을 받은 것 같다고 생각되면 좋을텐데, 적어도 벌을 받았다고 여기지는 않는 것 같아 다행이다. 엄마에게 그 정도의 딸은 되어줄수 있어 다행이다.
엄마의 소원대로 딸이 시집만 가면 엄마는 엄마 주장대로 발뻗고 잘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엄마는 그 날부터 새로운 걱정을 하나 만들어 "내가 무슨 죄가 많아서..." 라는 죄책감의 메들리를 읊어댈 것이다. 매사에 염려가 많고 자신이 없는 엄마가 늘 답답하기도 하고 때로는 화가 나기도 했다. 딸은 이제서야 짐작한다. 엄마에게 엄마 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엄마는 아직도 불안함의 탯줄을 끊지 못했다. 미완의 엄마가 아홉 달이 아닌 삼십 오 년을 품어온 덕분에 딸은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었다. 이성의 관심을 갈구하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한 애정을 쏟아준 엄마가 있었기에 연애나 결혼이 아쉽지 않았다. 엄마가 받아본 적 없던 모든 것을 딸에게 아낌없이 준 덕분에 딸은 정신적 허기를 느낄 틈이 없었다. 그러나 엄마의 공허함은 분화구처럼 늘 그대로였다. 딸은 이제 엄마를 품어주어야 겠다고 생각한다. 딸이었던 기억이 없는 엄마와 엄마였던 적 없는 딸은 그렇게 서로를 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