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의 바람

by 데이지

길고 길었던 설 연휴가 지나갔다. 신기하게도 연휴나 휴가는 아무리 길어도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주말 바로 다음에 절묘하게 위치해 직장인에게 최적의 휴가일수를 제공한 구정 연휴에 감사하며 음력이 제법 괜찮은 문화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음력 날짜는 농경사회의 산물이자 선조들의 지혜가 낳은 유산임을 안다. 음력이 있다는 것은, 그리고 음력 날짜가 양력보다 늦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덕분에 한 달여간의 차로 항상 인생에서 두 번째 기회를 얻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음력은 사실 늘 혼란을 야기했다. 대체 기준이 무엇인지 도통 셈할 수 없는 까닭에 항상 음력 계산기나 변환기를 검색해 날짜를 다시 찾아보곤 해야 하는데, 엄마 아빠는 어떻게 이 날짜가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계산이 되는지 신기한 노릇이다. 부모님을 비롯한 친척 어른들은 대부분 음력으로 생일을 지내신다. 부모님의 음력 생일을 변환해서 찾아보는 것만 해도 매년 헷갈릴 판국에 어른들은 어쩌면 그렇게 음력 날짜를 빠삭하게 아시는 걸까. 음력 날짜를 바탕으로 겨울 추위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이라던가, 여름 더위가 길겠다던가 하는 것을 예측하는 엄마를 보면 나중에 난 자식한테 저런 조언은 못 해주겠지 싶다.


음력이 선물한 긴 연휴를 보내며 그래, 두 번째 새해가 본격적인 새해지, 생각했다. 익숙한 기시감이었다. 새해에 지키지 못했던 새해 바람이 유예되는 안도감. 마치 원래 의도했던 것처럼 슬그머니 새해의 이런저런 결심을 다졌다. 어차피 1월 1일에 했던 결심을 그대로 Ctrl+c, Ctrl+v 해서 입력하겠지만, 작심삼일이 되풀이되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자꾸 갱신하고 되새기다 보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인생도 항상 이렇게 적어도 두 번의 기회는 주면 좋겠다. 아니, 삼세번이니까 세 번쯤은. 그래야 한 번 실수하고 두 번째에 넘어진다 해도 한 번 더 용기 내어 도전할 수 있을 테니까.


올해는 글도 더 많이 쓰고 공부도 좀 더 하고 연애도 좀 해 볼게. 엄마가 밤새 만든 떡만둣국과 모둠전과 갈비찜을 먹으며 작년과 비슷한 바람을 읊어대고 있으려니 엄마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작년과 재작년 설에는 너희가 또 한 살을 더 먹는구나, 하며 한숨을 푹 쉬던 엄마는 어쩐 일인지 올해는 탄식조차 하지 않았다. 곰삭은 감정이 마침내 무너져 내려서 서글픔조차 느끼지 못하게 된 걸까. 아니면 이제 지쳐서 모두 내려놓은 것일까. 응 그래, 하고 말하는 엄마가 자꾸 쪼그라들어가는 것 같아서 딸의 마음도 오그라들었다. 엄마에게 새해의 새 바람을 불어넣어주고 싶은데 엄마는 자꾸 바람이 빠져만 간다.


상을 치우고 따뜻한 거실에서 오후의 빛을 쬐며 TV 앞에 앉아 있다가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 잠에 빠져 들었다. 낮잠이 눈꺼풀을 잡아당길 때 최후까지 저항하던 딸은 가까스로 TV를 껐다. 한 시간 남짓 지났을까. 가족은 비슷한 시간에 눈을 떴다. 잠의 여운이 몽글몽글하게 남은 상태로 눈을 꿈벅이며 한 마디씩 했다.
-먹고 자기만 했는데 왜 이렇게 졸리지.
-원래 계속 쉬면 더 늘어져. 일어나서 뭐라도 좀 하며 움직여야 덜 나른해지지.
이렇게 말을 하면서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잠이 들었었나 보다. 싱크대의 물소리와 청소기 돌리는 소리에 놀라 일어났다. 벌써 밖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엄마는 저녁상을 차리느라 분주했고, 아버지는 그 사이 청소기를 돌리는 중이었다. 딸이 식객 노릇을 톡톡히 하는 동안 부모님의 '보이지 않는 손'은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점심 먹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잠만 자다가 또 저녁 먹으려니까 배가 안 꺼져서 많이 못 먹을 것 같아. 딸은 이렇게 말하고는 만둣국 한 대접을 뚝딱 비웠다. 과일과 한과도 야무지게 먹었다. 엄마는 놀라지도 않는다. 네가 그렇지 뭐. 언제는 먹는다고 예고하고 먹었니. 식욕이 없어도 이렇게 먹는데 식욕 있으면 큰일 나겠다.


정직한 대화를 나누며 훈훈한 가족의 정을 확인하고 딸은 설 특집 TV 프로그램을 보다가 밤이 깊어서야 집에 온다.
-연휴 동안 3kg는 찐 것 같아. 이게 다 엄마 때문이야. 나 진짜 이렇게 먹으면 안 된다니깐.
-억지로 먹으라는 사람 없는데 제가 신나게 먹어놓고는.
-몰라 나 다음 주부터 다이어트할 거야.
-왜 내일이 아니라 다음 주야?
-이번 주까지는 설음식이 많으니까 일단 이건 다 먹어야지.

엄마에게서 빠져나온 바람은 딸에게로 불어 들어온 것 같았다. 토실토실하고 탐스러운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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