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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Feb 20. 2018

엄마, 사진찍자

언제든 인출할 수 있는 기억을 위하여

힘든 해였다.

1년의 절반 정도는 병원에서 보낸 것 같았다. 어쩌면 생의 마지막을 준비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방정맞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


몸이 아파 본 사람은 안다. 신체의 병이 길어지면 심중의 병이 따라온다. 마음이 힘들면 몸도 지치고, 마음에 시름이 깃들면 몸도 시들해진다. 이 연결고리는 뇌과학적, 심리학적으로 증명하지 않아도 체험으로 먼저 깨닫게 된다.


아프기 전까지는 피사체로서 사진찍히는 것을 싫어했다. 사람이 아닌 카메라 렌즈를 보고 웃는 것은 영 자신이 없었다. 사진에 찍힌 내 모습은 낯설고 어색했다. 내가 이렇게 생겼던가? 기대하는 내 모습을 사진에서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에 찍힌 생김새를 보고 내 외모를 역으로 알게 되는 것이 쑥스러웠다. 여기저기 보일 만큼 월등히 어여쁜 외모도 아니고, 대단히 훌륭한 업적이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사진은 찍어 무엇하나 싶었다. 사진으로 남길 만한 가치가 없다고 나 자신과 내 기억들을 폄하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쩌면 생의 마지막이 머잖을 수도 있다 생각하니 변변한 '인생 사진' 하나 남기지 않은 것이 못내 후회스러웠다. 갑작스레 핼쓱한 얼굴로 사진을 찍어서는 아름답지 않을 것이다. 시린 겨울의 나목같던 때였다. 생기 없는 웃음과 핏기 없는 얼굴을 박제하고 싶지는 않았다. 여름 햇살처럼 생명력 넘치는 웃음을 얼굴에 담뿍 담은 사진을 남기고 싶었다. 생전 아파본 적 없는 사람처럼 마냥 밝고 해사한 모습으로 담기고 싶었다.


한껏 비련의 감상에 젖었으나 실은 중병이 아니었던 게다. 병원을 드나들다 보니 세상에는 훨씬 위중하고 심각한 질병과 사투를 벌이는 이들이 많았다. 예쁜 사진을 찍어둘 걸, 따위의 아쉬움은 진정 병마 앞에 고군분투하는 이들에게는 철없는 넋두리이자 감정의 사치일 뿐이었다. 생은 어째서인지 이처럼 교만한 자에게 시간을 더 허락하였다.


건강을 회복한 후 가끔은 사진을 찍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혹여 내가 세상에 없게 되었을 때 추도식에라도 쓸 수 있도록 그럭저럭 괜찮은 차림을 하고 찍어둔 사진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다. 차마 부모님께는 말씀드리지 못했다.




"너 이 때 참 예뻤는데."

객관적으로 크게 예쁘지 않은 사진을 두고도 어머니는 늘 예쁘다고 회상했다. 어머니의 기억에 딸이란 늘 벨 에포크이자 리즈시절을 사는 듯했다. 엄마 눈에만 그런 거라고, 어디가서 흉잡히니 행여 그런 말 말라고 핀잔을 주면서도 가슴이 뭉클했다. 고슴도치 딸은 혹시 무슨 일이 생겨도 어머니가 내 사진을 보고 예쁜 시절을 추억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부모를 앞서갈 때를 미리 대비하려 하다니 고약한 딸이었다.


딸은 도둑이라는 옛말은 틀린 것 하나 없었다. 딸이 아픈 것을 보는 동안 부모님의 마음이 얼마나 쪼그라 붙었을지 미처 생각지 못했다. 부모님은 건강도 기쁨도 다 도둑맞았다. 그 장물로 딸은 홀로 몸도 마음도 살이 오르고 부모님은 계속 빈한해졌다. 딸은 철없는 연민에 취해 미처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어머니가 갑자기 수술을 받지 않았다면 계속 그랬을 것이다. 서른이 넘어서도 어머니에게 빨랫감이나 맡기며 어디 내놔도 뒤지지 않는 불효녀로 살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나보다 키가 3cm는 넘게 크다. 그런데 환자복을 입은 어머니는 왜 이리 작아진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마취가 덜 깨어 말도 어눌하게 웅얼거리면서 자꾸 집에 가서 쉬라고 손사래를 쳤다. 어쩌면 사람이 그렇게 답답한가 어머니를 한참 나무랐다. 병원에서는 보호자가 필요하다는데 환자는 가족들더러 돌아가라 하니 부아가 치밀었다. 안타까움과 미안함은 왜 곧이곧대로 나오지 않고 애먼 화풀이로 토해지는가.


어머니는 내 얼굴에서 자신을 본다.


아버지는 더했다.

아버지와 병원 근처 백화점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주말이라 유난히 붐비는 백화점 지하 식품매장 입구에 웬 늙수그레한 할아버지가 보였다. 어깨가 구부정하고 머리가 희끗하게 센 할아버지는 오가는 인파에 어쩔줄 모르는 기색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그 야윈 할아버지는 내 아버지였다. 집이라는 익숙한 공간을 벗어나 완벽한 객체로 마주한 아버지는 그저 세상물정에 어두운 노인이었다.

- 아빠, 어디 앉아있지 그랬어.

괜히 속이 상했다.

SK-2 피테라 에센스를 보며 이건 SK에서 나온 거냐며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 아버지 앞에서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


노인의 행색이 완연한데도, 아버지는 여전히 서른 넘은 딸에게 슈퍼맨인 척을 하려 했다. 허리도 다리도 성치 않은 것을 아는데 굳이 무거운 생수 같은 것을 집에 갖다주려 했다. 요즘은 물도 쌀도 현관문 앞까지 배송해 준다고 만류하느라 애를 먹었다. 돋보기를 끼고 코를 찡그린 채 핸드폰을 내려다 보면서 자꾸만 딸에게 카카오톡으로 말을 걸었다. 카톡이나 이메일을 보내면서 요즘 시대에 뒤쳐지지 않는 아버지임을 인증받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았다. 살갑고 정다운 아버지는 자꾸 아이처럼 느껴져 걱정이 되곤 했다. 아이일 때 아버지는 귀신도 드라큘라도 강시도 무찌르는 초인이었는데, 어른이 되니 아버지가 이토록 못 미더울 수가 없었다. 어릴 때 잔소리는 아버지의 몫이었으나 이제 내 몫이 되었다. 어머니의 잔소리에 위풍당당하게 맞서던 아버지였으나 딸의 잔소리 앞에서는 한없이 왜소해졌다.


아무리 그래도, 엄마아빠는 영원한 나의 영웅.


부모님이 이렇게 점점 작아지다가 어떤 소실점으로 빨려들어가 버리면 어쩌지. 딸의 불안은 날이 갈수록 증폭되었다.

장성한 아들딸 마음껏 부려먹고 용돈 달라고 큰소리도 좀 치고 하면 될 것을 엄마아빠는 왜 자꾸 희생같은 것을 하려 해서 부채의식을 가중시키는가. 그렇잖아도 자식은 부모의 꿈에 빚을 지고 살아간다 믿는 딸의 채무를 왜 자꾸 늘려놓느냔 말이다. 빚쟁이 부모가 무서운 줄도 모르고 딸은 자꾸 큰소리를 쳤다.



삶도 기억도 유한한 것을 안다. 예외란 없으며 도망칠 수 없는 것도 안다. 집착과 소유를 줄이고 떠남과 헤어짐에 초연해져야 하는 것을 안다. 그러나 몇몇 무형의 기억과 유형의 사람들은 여전히 끌어안고 싶다. 삶을 지탱하는 소중한 것들은 조금 욕심내도 되지 않을까.


물욕이 줄어드는 것이 불경기 탓인지 나이든 탓인지는 모르겠다. 옷을 덜 사고 구두도 뒤축이 닳게 신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서른 중반이 다 되어가니 옷맵시도 나지 않고 '젊음발'도 쇠하여 겉치장은 무용지물이다. 유명 상표에도 심드렁해지고 값비싼 음식에도 입맛이 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추억을 소장하고픈 욕구와 기록을 간직하고픈 열망은 자꾸 불어난다. 그래서 딸은 한사코 사양하는 부모에게 같이 사진을 찍자고 졸라댄다. 고얀 딸은 이제 나이들어 사진이 곱지 않다며 피하려는 부모에게 끈덕지게 매달린다.


기억을 저축해 두고 싶은 탓이다. 매번 사진도 찍고 아버지의 카톡에 길게 답을 하고 때마다 손편지도 잊지 않을 것이다. 떠올릴 수 있는 장소와 회고할 수 있는 일들을 가능한 많이 만들 것이다. 거창하고 화려한 기억이 아니라 흔하고 소소해서 피식 웃을 수 있는 일화를 늘릴 것이다. 근검절약하라는 아버지 잔소리를 한 귀로 들어왔으나 기억은 알뜰살뜰 비축해 둘 터이다. 어차피 금전으로 부자가 되기는 틀렸으나, 언제라도 인출해 볼 수 있는 기억 부자가 될 터이다.


도난당할 염려도 해킹당할 걱정도 없는 자산을 욕심껏 쟁여둘 것이다. 모녀 사진, 부녀 사진, 가족 사진을 넘치도록 담아둘 것이다. 다음 번에도, 그 다음 번에도, 부모님을 만나면 또 말할 것이다.


"엄마아빠, 우리 사진찍자"


사람들이 가끔 묻는다. 누가 이렇게 사진을 찍어 주냐고. 모두 엄마아빠가 찍어준 것이다. 사진을 예쁘게 찍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피사체에 대한 애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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