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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Mar 08. 2018

그 아이들을 용서해 줘

영화 <써니>, 그리고 과거와의 조우

부모님 집에서 책을 찾다가 우연히 초등학교 시절 일기장을 보았다.

"나는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 버려서 억울하다. 다른 아이들처럼 더 늦게 어른이 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열세 살의 어린이는 일기에 이렇게 써 놓았다.

풋,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일기를 쓸 당시의 아이는 제법 심각했을 터이다. 일기장 검사를 하시던 선생님은 얼마나 실소를 금치 못하셨을까.

서른이 넘은 그 아이는 생각한다. 나는 대체 언제쯤에야 진짜 어른이 될까.


영화 <써니> 에서는 어른이 된 주인공 나미(유호정)가 어린 나미(심은경)와 조우하는 장면이 나온다. 벤치에 앉아 울고 있는 어린 나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꼭 안아주는 어른 나미.

가끔은 그렇게 스스로를 안아주고 싶을 때가 있다. 익숙한 신촌 거리를 걸을 때면 아직도 젊은 날의 고뇌와 근심이 기억나고 SSAT와 토익, GRE와 토플을 두고 방황하던 시절이 떠오른다. 바다를 건너고 싶던 어린 날과 바다를 건너지 못한 현재는 똑같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십수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방황하는 발걸음을 옮기며 과거의 나를 무척이나 미워했다.

- 그 때 조금만 용기를 냈더라면 인생이 달라지지는 않았을까.

소심한 30대는 더욱 소심했던 20대의 자신을 향해 자책과 원망을 쏟아내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조금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

복숭아빛 뺨을 빛내는 어린 대학생들을 바라보며, 교복을 입고 달려가는 풋풋한 고등학생들을 보며 생각했다.

젊음은 반짝거리고 아름답다. 싱그럽고 발랄하다. 불완전하고 미완이지만, 만개하지 않은 꽃봉오리와 같은 아름다움이 있다. 실수가 용인되고 치기가 용납되는 나이다. 신체의 신진대사 뿐 아니라 정신의 순환 역시 빠르다. 모든 것을 딛고 일어서는 속도가, 추진력과 돌파력이, 최신식 모터를 단 듯하다. 벽에 부딪쳐도 금새 방향을 전환하고, 장애물을 만나도 순발력 있게 도움닫기를 한다.

모험이 두렵지 않고 실패가 아프지 않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무언가에 도전하기 전에 맨땅에 헤딩하듯 덤벼드는 것이 아니라 헬맷부터 무릎보호대까지 꼼꼼히 찬다. 볼 줄 몰라도 나침반부터 챙기고, 방위가 헷갈려도 지도를 보고 또 본다. 어차피 다칠 것을 알면서 피할 수 없는 낙상이나 찰과상을 미리 걱정한다.

젊음은 부럽다. 모공 하나 없는 피부와 말간 눈빛이 탐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10대도 20대도 삶은 너무 버거웠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어른의 삶은 더 고단한 것이나 그래도 이만큼 살아왔다는 안도감이 든다. 살아야 하는 날들이 너무 길게 남아 있는 것에 현기증이 나곤 했다. 통계적으로 본다면 아직도 살 날이 훨씬 길지만 그래도 제법 많은 숙제를 해낸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마음은 홀가분해졌지만 몸은 벌써 지쳐간다.

힘을 내자, 고 힘없이 되뇌어 본다.

우리는 타인에게 무수히 "힘 내", "잘 될거야" 하는 위로와 용기의 말을 건네지만 실상 위로가 가장 필요한 사람은 늘 자기 자신이다. 그리고 타인에게 건네는 그 위로의 말은 내심 스스로를 향한 주문이기도 하다. 타인에게 했던 못된 말이나 상처를 입히는 행동은 부메랑처럼 되돌아 온다고 했던가. 용기를 북돋아 주는 말도 그처럼 내게 돌아오리라 믿었다. 좀처럼 돌아오는 것 같지 않자, 화자도 청자도 나 자신인 혼잣말을 한다.


알고 있다. 이처럼 마음이 힘든 것은 아직도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저만치 아스라한 스물 다섯의 나와 서른의 나. 더 멀리 고등학생 때의 나.
스물 다섯에도 서른에도, 더 자랄 데가 없을 만큼 이미 다 자랐다고 생각했다. 성장이 끝난 완성형 인간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서른 다섯이 된 지금, 아직도 또 앞으로도 평생 성장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5년 전의 나와 10년 전의 나는 까마득할 만큼 어리고 여리고 미성숙했는데. 그 불완전함을 다독여 주지 못하고 다그치기만 해 왔을까. 미완의 상태라 가장 괴로웠던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나 자신인데, 이미 지쳐있는 스스로를 왜 자꾸 학대하며 걸어온 걸까.


고해성사를 보고 신에게 용서를 빌어도 마음이 완전히 홀가분해 진 것은 아니었다. 이제 그 어린아이들을 용서해 줄 때가 된 것은 아닐까. 그리고 시간이 지났을 때 서른 다섯의 나를 미워하지 않기 위해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깨지고 부딪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눈 가리고 귀 막으며 들어선 길목마다 번번이 혹독하게 당했다. 내 삶은 유독 술수나 잔꾀가 먹히지 않았다. 그 때문에 오랜 시간 홀로 비명을 삭히며 살았다. 어쩌면 이제 그냥 부서질 각오를 하고 한 번쯤 부딪쳐 볼 때가 된 것은 아닐까. 이미 모두가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는 이 때에. 어차피 나는 조금 느린 사람이니까.


그러기 위해, 더 늦기 전에 그 아이들을 용서해 주어야겠다.

현재만을 토닥이면 될 줄 알았다. 늘 '지금'의 무게에 짓눌려 과거에 웅크리고 있는 아이들에게 미처 눈길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 '현재의 나'는 그 아이들의 연결선상에 있었다. 독립된 별개의 인격체가 아닌, 그 아이들의 합이었다. 왜 이제야 알았을까. 아직도 울고 있는 아이가 과거에 남아 있는 한, 지금 여기에 있는 나 역시 그 눈물을 함께 견뎌야 함을. 안개처럼 깔려 있던 감정의 근원은 아주 오래 전부터 유래된 것임을.

어른 나미가 어린 나미에게 그랬듯, 나도 그 아이들을 말없이 꼭 안아 주어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의 나도 다시 시작할 수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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