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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Apr 03. 2019

퇴근할까 퇴사할까

첫 책이 나왔습니다

시끄럽고 조용한 아이였고, 활달하고 얌전한 아이였으며, 뛰어노는 것을 좋아하지만 책읽는 것을 즐기고, 질문과 호기심이 많지만 참을성이 많은 아이이기도 했다. 아이는 글을 일찍 깨우쳤는데 아이의 영특함 때문이라기보다는 아이의 심심함 때문이었다. 아이는 엄마와 놀고 싶었는데 엄마는 주로 아팠다. 엄마는 주로 힘이 없었고 누워 있었는데, 그래도 아이의 수많은 질문에는 꼬박꼬박 답을 해 주었다. 엄마가 아이에게 글을 가르친 과정이 아이는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무척 빨리 배웠다고 한다. 다시 한 번, 아이의 습득력은 심심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는 주로 오빠와 놀았는데, 오빠가 유치원에 가고 나면 놀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아이는 책을 읽었다. 누워 있는 엄마 옆에서 엎드리거나 누워서 책을 읽었다. 한 권을 읽고 나면 뒹굴뒹굴하며 엄마에게 책 내용을 이야기해 주고, 생각나는 것들을 이야기하고, 질문을 쏟아내고,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고, 또 책을 읽고. 오빠가 돌아오면 오빠와 함께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며 놀고. 그래도 책을 읽는 동안에는 조용했기에 엄마는 안심했다. 책을 읽는 일은 혼자 하는 일이면서 함께 하는 일이었다. 책의 저자와, 등장인물과, 그 시대의 사람들과. 그들은 이야기를 하지만 귀찮게 하지는 않는, 완벽한 친구들이었다.


이 생활은 오빠가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재미있는 일이 생겼다. 집에 있는 책은 다 읽어서 더 이상 읽을 것이 없어진 아이는 오빠의 교과서를 읽었다. 교과서나 표준전과를 읽는 일은 공부라기보다는 놀이의 연장이었다. 책읽기 놀이. 새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오빠는 새 교과서를 받아왔고 새로운 읽을거리가 생겼다. 아이는 새학기가 설렜다. 덕분에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아이는 공부를 따로 하지 않아도 공부를 제법 잘 했다. 그러나 특목고에 가서는 이 방법이 통하지 않았다. 이전까지 공부를 따로 해 본 적이 없던 아이는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악착같이 성적에 매달리는 타입도 아니었다. 그럭저럭 아이는 대학생이 되었다.


아이는 대학의 신문사 기자를 하고, 삼성그룹 웹진 기자를 하고, 이유는 모르지만 언론인이 될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다가 돌연 외국계 은행에 입사하여 글과는 거리가 먼 일을 하며 살았다. 하루 종일 숫자와 영어만으로 일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아이는 이 일이 적성에 맞았다. 10년을 넘게 아이는 숫자, 엑셀, 영어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살았다. 이 세상은 균형잡히고 정답이 있었고 조용하고 예측가능했다. 그러다가 또 돌연 부서 이동을 했다. 전략기획, 혁신, 비전, 조직. 업무는 판이하게 달라졌고 다시 글을 쓰게 되었다.


글을 쓰는 일이 정말 '일'이 된 아이는, 내친 김에 글을 계속 쓰기 시작했다. 글은 써야 할 때와 쓰고 싶을 때가 있었다. 쓰고 싶을 때보다 써야 할 때가 많아지면서 아이는 혼란한 평온을 느꼈다. 머릿속에 부유하는 생각들을 잡아 올려 글로 정리해 놓으면, 어지럽게 옷가지가 늘어져 있던 방을 정돈해 놓은 듯한 평안한 감정이 들었다. 그래서 썼다. 이야기해야 하는 것과 이야기되어야 하는 것들에 대해.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수 없었던 것들과,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잊을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해. 생각의 편린들과 기억의 섬광들은 그렇게 모여 글이 되고 이야기가 되고 책이 되었다.


글을 쓰는 일은 익숙하지만 익숙해지지 않고, 책을 쓰는 일은 그저 서툴렀다. 그렇지만 책이 나온 것은 소중하고 신기하고 무엇보다 안도감이 들었다. 해야 할 일을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언젠가 아이는 또 다른 책을 쓸 수도 있겠으나, 지금 아이의 손에 들린 책은 정식으로 발간된 첫 번째 책이다.

안녕, 반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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