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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Apr 19. 2022

타인의 해석

“와, 심-각하다.”

남편이 자주 하는 말 중에 하나다. 뭐가 그렇게 심각한지, 아무튼 연신 심각하단다. 부인이 뭔가를 잘못하기를 기다렸다가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신이나서 심각하다고 노래를 불러댄다. 단순히 "심각하다"가 아니라 "심"에 강세를 주어 아주 길게 늘여낸다. 심각한 것이 아니라 "쉬이임각”해진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음식 간이 안맞거나 운전하다가 브레이크를 조금 급하게 밟거나 하면 또 대번에 “충-격적” 이라느니 “경악” 이라느니 하며 구박이 쏟아진다. 한두 번 들을 때는 재미있었는데 무슨 말만 하면 심각하다는 둥, 충격적이라는 둥 하니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대체 이걸 화를 내야 하는 것인가, 한번 따끔하게 지적해서 바로잡아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고 예능으로 던진 말에 다큐로 대응하는 눈치없는 사람이 되고싶지는 않아 꾹꾹 참으며 지켜보고만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지만, 또 이렇게 놀려댈 때에 남편의 표정은 대단히 신이 나 보인다. '저세상 철없음'의 모습에 화가 나려다가도 웃음이 터지기도 한다.


부인의 신경을 건드리는 남편의 언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옷매무새에 신경을 쓰는 남편은 종종 저녁에 다음날 아침에 입을 옷을 생각해 놓곤 한다. 대충 아침에 되는대로 집어입느라 옷장을 헤집어 놓고  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는 나와는 달리, 남편은  하나를 입을 때에도 계획적이다. 그런데 매일 옷장을 열고는 입을 옷이 없다며 이건  “와이프 케어가 부족한 이란다. 아니 옷이 이렇게 많은데... 이것도 예쁘고 저것도 괜찮은데... 라고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본전도 찾지 못한다.  비슷한 색인데다가  옷은 너무 얇고  옷은 너무 두껍고  옷은 너무 오래됐단다. 그러고 나서 계속 "와이프가 챙겨주지 않는" 것들에 대해 속사포처럼 말이 쏟아진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투정부리며 밉게  때와 똑같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남편은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 그러고 보면 옷을 벗어서 정말 아무데나 - 가령 상의는 수건 두는 곳에, 하의는 거실 바닥에 두는 식의 창의적인 장소에 - 두는 것이나, 설거지는 절대 하지 않는  등도 아이같다면 아이같달까.


말 안 듣는 아이들은 훈육이라도 할 수 있을텐데 미운 짓 하는 남편은 가르치기에는 이미 나이가 너무 많다. 거의 40년 가까이 같은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이 뭐 크게 바뀌겠나. 반쯤 포기하고 지낸다지만 이 사람이 밖에서도 이러고 다니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항상 놀려댈 사람이 필요한 남자가 대체 나 없으면 누구한테 이러지. 이 의아함은 결혼 백일만에 풀렸다. 남편이 입만 열면 이야기하는 소위 '베프'가 있었다. 이 친구는 꼭 만나야 한단다. 그렇게 만난 남편의 친구분은 초면에 대뜸 묻는 것이었다.

"얘가 힘들게 하지 않아요?"

남편은 고등학교 때부터도 이 '베프'를 그렇게 놀려댔다는 것이다. 뭐 하나 꼬투리를 잡으면 신이 나서 노래를 부르듯 한동안 읊어댔다는 것이다. 그럼 그렇지. 그러고 보니 남편은 시어머니께도 자기는 어릴 때 엄마 케어가 부족해서 지금 예민해졌다는 둥, 아들이 왔는데 왜 맛있는 걸 안 해주냐는 둥, 왜 빨래를 안 걷었냐는 둥 구박하기 바빴다. 어머님 서운하실까 걱정되어 안절부절 못하는 며느리와 달리 시어머니는 아주 쿨하게 아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셨다. 한평생 아들의 투정을 들어 오신 어머님은 이미 적응하셨던 것이다.


자신이 진짜로 믿고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 자신이 가장 편안하게 느끼고 자신의 가장 약한 모습까지 보여줄 수 있는 사람. 가족일 수도, 친구일 수도 있는 이들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각각 다르다. 더 예의를 차리고, 더 소중히 대하고, 더 섬세하게 표현할 수도 있지만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어린아이들이 좋아하는 아이나 짝꿍을 괜히 더 괴롭히듯이. 남편은 후자였다. 툴툴대고 툭툭 던지고 툴툴거리는 말들은 모두 남편 나름의 애정 표현이었던 것이다. 바깥에서는 깍듯하고 예의바르고 처신 잘하는 남편이지만 집에서는 딴사람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 점을 모르고 화를 내거나 지적을 했다면 남편의 구박은 피했겠지만 남편이 응당 집에서 느껴야 할 편안함도 피하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나의 표현 방식을, 나의 언어를 상대가 알아채 주기를 바라지만 실상 그것은 요원한 일이다. 무장해제할 상대를 잘못 고르면 나만 타격을 받는다. 타이밍을 잘못 맞춰도 마찬가지다. 내가 눈치채지 못하는 나만의 언어도 분명 있을 것이다, 아니 있다. 남편은 처음에 적잖이 당황했다. 그렇지만 남편도 이내 적응했다. 물론 그것마저 남편에게는 놀림거리가 된다. 수십 년을 독립된 인격체로 살아오는 동안 쌓인 나만의 방식. 그리고 이제 함께 살며 적응해야 하는 서로의 방식. 부부생활에서의 갈등은 상대를 읽지 못할 때 시작되고, 서로의 언어를 읽더라도 이해하려 하지 못하면 갈등이 불거진다.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알고 살아온 사람에게 왜 그렇게 말하는지를 따지는 것은 무용하다. 원래 그런 사람이므로. 결혼이란 어쩌면 커다란 세상을 헤매다 만난 이방인들이 함께 삶을 살며 상대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끊임없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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