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둘도 제법 괜찮다
나는 정말 패셔니스타였다. (과거형이다) 오죽하면 전 직장을 퇴사할 때 부서원들이 한마디씩 돌아가며 소감을 얘기하는 자리에서 내가 옷을 잘 입어서 눈이 즐거웠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니. 직장에서의 성과란 것은 매일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옷은 매일 입고다니다 보니 어쩔 수 없나보다. 특히나 부서 특성상 전 회사에서도 지금 회사에서도 늘 임원들과 자주 접하는 부서에 있다 보니 더더욱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남편도 마찬가지다.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든 생각은 ‘옷과 스타일에 꽤나 신경을 쓰네’ 였다. 사실 이건 꼭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나에게 이상형을 묻는다면, 미드 ‘빅뱅이론’에 나올 법한 이과 연구생이었다. 안경을 껴야 하고 순박하고 옷같은
것은 잘 입을 줄 모르는. 너무 잘 꾸미는 남자는 왠지 날라리(?) 일 것 같은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남편을 만날 때에도 이과생이라는 것이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남편은 처음 만났을 때 하늘색 자켓에 흰 티에 요즘 유행하는 길이의 바지를 입고 로퍼를 신었다. 몇 번 만나면서도 옷을 잘 입는구나, 머리 길이도 늘 단정하게 유지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결혼하고 나서 나는 내가 얼마나 옷이 많은지, 신발이 많은지를 새삼 깨달았다. 내가 얼마나 외모를 꾸미는 데 돈을 많이 쓰는지도. 그렇게 갈고 닦은 쇼핑 실력으로 겉치장을 해서 남편이 내 외양을 더 좋게 봐 줬을 수도 있다. 그런데 누군가의 말처럼, 결혼을 하고 나니 꾸미는 비용은 계정이 바뀌게 됐다. 결혼 전에는 투자(investment) 계정에 속하던 것이 결혼 후에는 단순 지출(expense) 계정으로의 재분배가 이루어진다고나 할까. 생활비를 아낄 수 있는 항목 중 첫째는 옷값, 신발값이었다.
결혼했으니 대충 후줄근하게 하고 다녀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결혼 전에는 효과는 모르겠고 일단 비용을 투입하고 보자는 식이었다면, 결혼 후에는 최소비용으로 최대효과를 봐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잡았다. 자, 그동안 연마한 쇼핑의 기술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때다. 어차피 매일 지하철에서 부대끼며 출퇴근할거, 비싼 옷은 필요 없다. 코트나 패딩이 아니면 백화점 말고 인터넷 쇼핑몰에서. 어차피 비싼 걸 사도 내년에 유행이 바뀌면 또 살 걸 알고 있다. 그리고 물빨래가 되는 옷을 사야한다. 삼만원짜리 원피스를 사고는 칠천원짜리 드라이를 맡기면 좀 아까우니까.
머리는 꼭 비싼 헤어숍을 갈 필요가 없다. 일단 집에서 가까워야 하고, 그 다음엔 가성비를 찾는다. 비싼 시술은 어차피 받을 필요가 없다. 이 정도 나이를 먹으면 적어도 나한테 어울리는 헤어스타일이 뭔지는 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난 유부녀니까, 남편 눈에 예쁘게 보이는 게 중요하니까, 모험을 하지 말고 남편이 좋아하는 스타일로 꾸민다. 그럼 옷이며 구두며 헤어스타일이며 시행착오를 할 필요가 없다. 나름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해진다. 결혼은 이런 면에서 제법 효율적인 시스템인 것이다!
남편은 알고 보니 원래도 알뜰한 사람이었다. 옷이며 신발이며 좋은 것을 사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10년은 입고 신는다. 대신 옷이며 신발이며 관리를 정말 잘 한다. 옷은 소재와 특성에 맞게 각기 다른 옷걸이에 걸어서 보관하고 구두에는 모양이 망가지지 않게 하는 고정 틀 같은 것을 끼워 놓는다. 대부분은 아울렛과 유니클로를 이용하고 당근도 매우 잘 활용한다. 자기에게 어울리는 컬러 톤이며 스타일을 잘 알기에 남편도 모험을 하지 않는다. 다행히 남편도 나도 체형에 큰 변화가 있는 타입들이 아니라 옷을 오래 입을 수 있다.
아끼는 게 있으면 지출하는 항목도 있다. 가령 남편은 와인을 좋아하는데, 우리는 가끔 와인을 싸게 파는 구판장이나 마트를 데이트 겸 간다. 주말 저녁에 TV를 보면서 와인을 마시는 행복 정도는 지켜줘야 하니까. 나는 다른 악세서리는 잘 안 하는데 귀걸이는 거의 매일 한다. 그래서 일 년에 하나 정도는 좋은 귀걸이를 산다. 팔찌는 겨울엔 안보이고, 반지는 음식 할 때 좀 귀찮지만 귀걸이는 사계절 할 수 있고 귀에서 달랑거리면 기분도 좋으니까. 이 정도의 소비는 서로 격려해 준다.
결혼 전의 나는 하이힐에 명품백을 들고 다녔는데, 결혼 후의 나는 단화에 에코백을 들고 다닌다. 아끼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나이가 드니 하이힐은 힘들고 명품백은 귀찮다. 거기다 요즘 유행도 아니다. MZ 세대는 하이힐 안신더라. 스타벅스를 프리퀀시며 다이어리를 매번 받던 내가 스타벅스를 가지 않은 지도 오래 되었다. 가끔 기프트카드나 기프티콘을 받을 때만 간다. 그나마 아끼지 않던 자기계발 비용도 줄였다. 유튜브를 보며 홈트를 따라하고, 영어학원 대신 동기들과 영어책 읽기를 한다.
남편은 소박하지만 단단해진 부인의 변화를 좋아하고, 나 역시 지출을 조금씩 줄여 나가는 스스로가 자랑스럽다. 결혼 전에는 그렇게 지출을 하면서도 뭔가 채워지지 않는 불안함이 있었는데, 결혼을 하고 나니 지출을 줄여도 충만함이 있다. 아마도 이 모든 것을 함께할 누군가가 있다는 안온함일 것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컷트비가 싼 미용실을 찾아 다니다가 드디어 정착한 남편과, 남편이 어디선가 받아온 에코백을 출퇴근 가방으로 들고 다니는 아내는 지금의 삶이 꽤나 만족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