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실은 자주) 엄마를 보면 속이 터질 때가 많다.
엄마는 고속도로 휴게소나 동네 마트나 이런데서 20대-30대 초반의 젊은 청년들이 장사를 하는 걸 보면 지나치지를 못한다. 자식 같아서 뭐라도 팔아주고 싶단다. 미용실에 가서 미용실 직원이 머리를 감겨주거나 하면 꼭 나중에 오천원이든 만원이든 쥐어주고 온다. 자식같아서, 아니면 자식보다도 어린애들이 고생하는게 안쓰러워서 그런단다.
한번은 엄마랑 식당에 갔는데 알바생의 실수로 주문이 누락됐다. 알바생은 죄송하다며 주문을 다시 넣어 주겠다고 했다. 엄마는 괜찮다고 했다. 어린애가 일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단다. 땅파면 돈나오는 것도 아니고, 내가 서비스 받으러 간 데서 오히려 내가 서비를 해 주고 와야 하는 거냐고 투덜댔지만, 엄마는 나를 나무랐다. 너도 자식 생기면 알게될 거란다.
나는 이제 임신 14주차 임산부가 되었다. 그리고 엄마의 말 뜻을 알 것 같다.
나이 마흔 하나에 기적같이 임신을 하고, 한동안 감사와 기쁨과 두려움에 잠을 설쳤다. 내 뱃속에 생명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고, 혹여라 아이가 잘못될까 바깥 출입도 삼갔다. 아이만 제대로 태어나서 자랄 수 있다면 내 한몸은 어찌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지나가는 아이들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저 아이들도 아이엄마가 나처럼 온 몸과 마음을 바쳐 열 달을 품었을 테고, 열 개를 해주어도 열한 개를 해줄 수 없음을 미안해 하며 키웠을 거다. 아이들 뿐이 아니었다. 회사에서, 길에서 20대의 꽃 같은 청년들을 볼 때몀 내 아이도 언젠가 저렇게 크겠지, 미소가 번졌다. 그렇다, 나는 엄마의 시선으로 사람들을 보게 됐다.
엄마가 된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내 자식이 너무 귀해서, 남의 자식들도 귀한 것이었다. 나에게 커피를 건네주는 알바생도, 음식배달을 온 배달원도, 사무실에 있는 20대 막내직원도, 모두 누군가의 소중한 자녀니까.
내 자식이 귀한 만큼 남의 자식도 귀하게 대하게 됐다. 누구에게든 덜 속상하고, 덜 화가 났다. 누구든 더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저 아이들이 저만큼 크기까지 부모는 매일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았을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요즘 몇몇 엄마들은 내 자식만 귀하다. 내 자식’도’ 귀해야 하는데, 내 자식’만’ 귀하다. 남의 자식은 같은 반 친구든, 학교 선생님이든, 가게 직원이든 상관이 없다. 내 자식을 위해 남의 자식은 짓밟아도 되는 그런 세상에서는, 내 자식도 잘 자랄 수 없다. 언젠가, 누구에겐가 내 자식도 당할 수 있고 억울한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세상에 영원한 강자는 없다. 부모가 영원히 자식의 방패가 될 수도 없다.
나는 사회 문제에 이렇게까지 화를 내거나 속상해 본 별로 없다. 그런데 이건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그 20대 선생님은 삶을 정말 치열하게 살았을 게다. 그래야 그 나이에 초등학교 정교사가 될 수 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던 삶에 대한 대가는 학부모의 폭언과 갑질, 교장의 외면과 강요, 호소할 데 없는 현실 뿐이었다. 학교와 가해 학부모는 한술 더 떠서 잘못된 교육제도와 추악한 인성으로 인한 희생을 너무나도 어린 한 선생님의 개인사로 몰아가려 한다.
’라떼는‘ 선생님은 하늘 같았다. 학교에서 선생님께 혼났다고 집에와서 엄마한테 말하면, 네가 뭔가 잘못해서 혼났겠지 하며 엄마한테 한 번 더 혼났다. 지각을 하거나 숙제를 안 하거나 수업시간에 떠들거나 등등 잘못을 하면 벌을 받는 것이 당연했다.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남을 괴롭히는 것은 나쁜 행동이고, 공동생활에서 지켜야 할 규율을 지키지 않으면 지적을 받거나 야단을 맞는 것이 마땅했다.
나 역시 선생님들께 숱하게 혼나보았다. 물론 개중엔 하키채로 무자비하게 애들을 때리거나 뺨을 때리는 선생님들도 있었다. 이런 폭력은 없어져 마땅하다. 그러나 훈육을 위한 제재수단은 필요하다. 그 훈육의 권한은 선생님이 갖는 것이고, 선생님의 권위가 살아야 선생님의 말에도 권위가 생긴다.
잘잘못이 없이 무조건 잘했다고 하면 아이가 어떻게 옳고 그름을 배울 수 있겠나. 무슨 일이든 선생님 탓이라고 하면 아이가 어떻게 책임감을 배울 수 있겠나. 뭐든 엄마아빠가 막아주면 어떻게 자립심을 가질 수 있겠나. 그런 아이들을 영어유치원에 해외유학에 각종 사교육으로 무장시켜 명문대에 보내고 사회지도층을 만들면 그 나라는 어떻게 되겠나.
요즘 뉴스를 볼 때마다 나는 눈물이 많이 난다. 아마도 임신을 해서 감수성이 예민해진 것도 있겠지만, 이제 내가 어떤 나라에 살고 있는지 처절하게 보이는 탓이 더 크다. 이런 나라에서, 이런 사회에서 아이를 키워야 하는데 국가는 자꾸 아이만 낳으라고 한다. 아이를 낳은 결과가, 그 아이가 열심히 산 결과가 이런데도.
그래서 나는 자꾸 미안해진다. 아이들에게 미안해지고 선생님들께 미안해지고, 어린 군인들에게도 미안해진다. 내가 뭘 잘못해서가 아니라, 그냥 내가 어른이라 그렇다. 내가 엄마라서 그렇다. 내가 사회 구성원이라 그렇다. 그런데 진짜 잘못한 사람들은 아무도 미안해하지 않는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