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데이지 Jul 01. 2018

데이지를 위하여

-우리 모두는 결국 데이지의 다른 이름이므로

모르겠다.

"왜 데이지야?" 라는 브런치 필명이 대한 답인지,

어릴 때는 이해되지 않던 세계 명작에 대한 뒤늦은 깨달음인지,

혹은 잊고 있던 꿈에 대한 아련한 회한인지.

단지 자꾸 생각할 뿐이다.

데이지는 우리 모두의 또다른 이름이며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고.


'현재까지 영어로 쓰인 최고의 소설.' 이 수식어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영문학 수업을 듣기 위해서 <위대한 개츠비> 를 읽는 것은 필수였다. 교수님은 가끔 '위대한 개츠비'를 이야기하며 상념에 젖은 소녀같은 표정을 지으시곤 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 소설이 왜 그렇게 유명한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조금 복잡한 연애소설로 보일 뿐이었다. 더구나 개츠비의 행동은 과시욕과 허풍에 사로잡힌 남자아이의 전형 같았다. 내면은 조금 소심하고 집착도 강한 그의 모습은, 달리 표현하면 철딱서니 없는 스토커같지 않은가 말이다! 데이지를 위해 성취했으나 결국 그 때문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개츠비. 따라서 '위대한 개츠비' 가 아니라 '위대한 데이지'라고 하는 편이 정확하다고 우스개소리를 하곤 하였다.
 
10여 년이 지나 다시 생각하는 이 이야기는 참으로 애잔하다. 개츠비도, 데이지도, 닉도, 톰도 모두 측은하기만 하다. 개츠비는 가엾은 희생자가 된 것 같지만 이 이야기의 유일한 승자이기도 하다. 적어도 그는 순수한 꿈이 있었고, 그 꿈을 거머쥐기 직전까지 갔으며, 꿈을 향해 달려가는 내내 행복했을 것이므로. 간혹 사람들은 (특히 남자들은) 데이지를 악녀라고 언급하며 분개하기도 한다. 데이지는 사실 비난받기에는 억울하다. 비난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한 일이 없다'. 팜므파탈도 아니고 개츠비를 작심하고 홀린 적도 없다. 그저 젊은 시절 마음을 주고 받은 연인이 하필 개츠비였을 뿐이며, 그녀가 하필 한 남자의 마음에 각인될 만큼 아름다웠을 뿐이다.



한 여인이 보잘 것 없던 남자를 신화적 존재로 만들 만큼 대단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것. 그 마력이 단순히 외적 아름다움 때문이었을까. 아마도 '사교계의 총아 데이지'로 상징된 상류사회의 매력이 함께 작용했을 것이다. 닿을 수 없는 까마득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손을 뻗치면 닿을 수 있을 듯한 희망. 개츠비에게 본디 내재된 상위 계층에 대한 동경과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절박함이 결합된 결과이리라. 개츠비는 원래 제임스 개츠가 아닌 제이 개츠비가 되고 싶었다. 그 잠재된 욕망을 깨닫지 못하거나, 특정한 계기가 필요했을 뿐이다. 그것은 데이지라는 일생의 사랑을 만나는 순간 폭발한다. 데이지는 그 욕망의 촉매 작용을 하였다. 단순히 사랑하는 여인의 손을 잡고 도망치지도 않았고 얼굴 한 번 보고 돌아서지도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그는 데이지와, 데이지가 속한 계층의 삶, 그것을 모두 패키지로 갖고 싶었던 것이다. 그 세트장이 완성되고도 데이지가 없으면 안 될 만큼 데이지는 그의 환상에서 주연이었다.
 
이미 그 세트장을 이룬 그가 마음만 먹으면 어떤 여자든 쉽게 가까이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성공한 남자에게는 여자가 따른다고 합리화하며 여성 편력을 일삼는 것도 가능하였다. 필히 존재했을 유혹을 무시하고 데이지에 대한 순정을 지킨 것은 분명 위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이지가 개츠비에게 올 수 없는 것 또한 당연하다. 사상누각같은 개츠비의 성에 오는 순간 그들은 함께 무너질 것이므로. 데이지는 상류사회의 데이지 뷰캐넌으로 남아야 오롯한 데이지의 모습을 지킬 수 있을 것이므로. 꿈꾸는 소년 개츠비의 뮤즈가 아니라 이미 공고한 성에 사는 뷰캐넌의 전리품이 그녀가 응당 있어야 할 자리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개츠비의 환상 속에서는 영원히 주인공인 여인이나 현실에서는 영원히 자아를 가질 수 없는 여인. 그래서 데이지는 데이지로 남아야 한다. 데이지라는 시발점이 없이 그는 타오르지 않았을 것이며 그 매개체 없이 분출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데이지라는 목표 없이 그의 신화는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데이지를 조금 더 변론해 보자. 데이지의 무능함은 그녀의 탓도 아니고 그녀만의 특성도 아니다. 시대의 유산일 뿐이다. 영화 <모나리자 스마일> 은 195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이다. 여기에서조차 여성이 주체적으로 꿈을 추구하는 것은 파격적이며 선구자적인 일로 그려진다. 하물며 <위대한 개츠비>의 배경인 1922년 미국에서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얼마나 되었겠는가. 데이지 같은 여성이 자기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무엇인가를 해 본다는 일이 가당키나 했겠는가. 권력을 가져본 적 없는 자에게 권력을 준다 한들 휘두르는 방법을 모르듯, 자유를 가져본 적 없는 자에게 자유를 준다 한들 무의미한 일이 되고 만다. 주체적인 삶을 살아본 적 없는 데이지에게 개츠비라는 모험은 지나치게 고난이도의 선택지다.
 
데이지는 입체적인 인물이지만, 방황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뷰캐넌과의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을 이어갈 만큼 지극히 속물적이기도 하지만, 사랑하는 개츠비를 마음에 담고 있으며 그와의 재회에 꽃처럼 만개할 정도로 순수한 애정에 목말라 있기도 하였다. 현재의 소유를 벗어나 개츠비를 택하지는 않을 만큼 현실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남편의 외도를 알고 있으면서도 어쩌지 못할만큼 무력하다. 술과 쇼핑으로 해소하며 비틀린 걸음을 걷지만 현실을 벗어날 용기조차 없는 여성이다. 딸은 바보였으면 좋겠다는 그녀의 자조섞인 말은 사실 눈감고 귀막고 입을 닫아야 살 수 있는 스스로에 대한 절망이다. 그러나 그녀는 나약하다. 개츠비와 같은 추진력과 의지가 그녀에게는 없다. 온실의 꽃으로 길러진 그녀는 그 삶이 행복하지 않더라도 온실 밖으로 나가고 싶지는 않다. 익숙한 공허와 물질적 부유 속에서 하루하루를 기쁨 없이 살아간다.



결국 낯선 사랑보다 낯익은 권태의 나날을 택한다. 진실한 사랑은 그 시대와 그녀에게 모두 생경한 것이었기에. 오로지 데이지만을 꿈꾸며 달려온 개츠비의 열정은 데이지가 생전 처음 접하는 욕망과 집착의 모습이었으리라. 시대의 아키타입과 제도권 안에서의 안락함이 오히려 더 쉽고 편한 맞춤옷이었으리라. 현실과의 타협. 꿈보다 현실을 택하는 대부분의 우리는 데이지에 더 가까우므로. 마지막까지 주저하다가 결국 그냥 주저앉는 데이지로 인해 비로소 '위대한' 개츠비는 완성된다.

마음 속에 누구나 하나쯤 그린 라이트를 품어보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불 꺼진 그 황량한 필라멘트와 전구 위의 먼지를 애써 외면해야 하지 않았겠는가. 물질의 세례를 걷어낸 데이지의 삶을 살아가지만 점점 멀어져 가는, 혹은 불이 꺼져 버린 초록 불빛이 자꾸 아리게 상기된다.


“개츠비는 그 초록색 불빛을, 해가 갈수록 우리 앞에서 뒤로 물러가고 있는 황홀한 미래를 믿었다. 그것은 우리를 피해갔지만 그다지 문제되지 않는다. 우리는 내일 더 빨리 달릴 것이고, 더 멀리 팔을 뻗을 것이다······. 그러면 어느 맑은 날 아침······. 그러므로 우리는 흐름을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나면서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 F.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