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에 어머니를 여읜 엄마는 스물 넷에 시집을 가기 전까지 현관에 놓인 신발들을 볼 때마다 그리 서글펐다. 여중생, 여고생 시절 엄마는 학교에서 집에 돌아올 때마다 대문 앞에 놓인 신발들 가운데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신발이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곤 했다. 왈칵 반가운 마음이 들어 뜀박질을 해 안방으로 향했으나 엄마가 찾는 얼굴이 있을 리 없었다. 열 예닐곱의 엄마는 이내 현실을 깨닫고 섧게 울곤 했다. 시간이 지나며 눈물을 흘리는 횟수는 줄었으나 그리움이 줄어든 것도, 애잔함이 사그라진 것도 아니었다.
엄마의 우는 모습을 처음 본 것은 다섯 살 무렵이었다. 엄마가 이모와 전화를 하다가 "엄마, 엄마" 하고 부르며 흐느끼는 것을 본 것은. 엄마도 엄마가 있으리라는 당연한 사실을 다섯 살 아이는 새삼스레 깨달았다. 열린 방문 틈으로 길을 잃은 아이처럼 슬피 울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 살금살금 방으로 돌아와 오빠와 함께 고민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엄마를 위로해 주어야 할까 모르는 척 해야 할까. 엄마가 우는 것을 우리한테 들키면 창피하려나. 우리는 결국 엄마를 달래주기로 결심했다. 엄마는 우리를 품에 안고도 울기를 멈추지 못했다. 엄마도 유난히 엄마가 보고 싶은 날이 있는 모양이었다.
내 신발은 엄마에게 슬픔이 아닌 기쁨을 주는 것을 안다. 눈물이 아닌 웃음을 만드는 것을 안다. 환상이 아닌 실재하는 신발이 예기치 못하게 눈 앞에 놓여 있을 때 엄마가 얼마나 행복해 하는지를 안다. 마법도 요술도 아닌 고작 신발 한 켤레가 이렇게나 힘이 센 것을 안다. 부모님이 집을 비운 사이 부모님 집에 가서 혼자 기다리고 있을 때가 있다. 딸은 엄마의 신발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의기양양하게 집에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엄마의 신발이 없어도 서운하지 않은 것은 엄마가 이내 집에 올 것을 알기 때문이다.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엄마는 현관에 놓인 딸의 신발을 알아보고 반색을 한다. "언제 왔니? 오래 있었어?"
딸의 신발만으로 벌써 엄마 목소리에 반가움이 묻어날 때 조금은 뿌듯해지고 조금은 푸근해진다. 내 신발이 실제 존재하는 것이어서, 내가 엄마 옆에 나란히 앉아 있을 수 있어서, 다행하고 감사한 일이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하고 사소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삶의 의미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가끔은 엄마가 집을 비운 사이 집에 가 있곤 한다. 딸의 신발을 보고 신이 나서 딸의 이름을 부르며 들어오는 엄마의 모습이, 가끔은 엄마를 부르는 아이같이 느껴질 때가 있어 자꾸 마음이 저릿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