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셋, 예순 둘

by 데이지


지난주 화요일은 엄마 생신이었다. 엄마 나이는 이제 만으로 예순 둘이 되었다. 언제부턴가 엄마는 굳이 만 나이로 셈을 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탄생일의 기쁨보다 살아온 날들의 무게 쪽으로 저울추가 기울게 되는 일이리라. 나이 앞자리 숫자가 3으로 바뀌었던 날이 문득 생각났다. 홀가분함과 씁쓸함, 적당한 체념과 적당한 여유가 더해져 묘하게 기쁘고 조금은 허탈했던 그 때의 감정이. 나이 앞자리 숫자가 6으로 바뀐 엄마의 심정을 딸은 반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 분명해, 딸은 그저 엄마를 바라본다.


엄마가 중학생 때 외할머니가 세상을 뜬 탓에 엄마가 기억하는 외할머니의 모습은 지금의 엄마보다 훨씬 젊다. 외할머니는 마흔 셋에 돌아가셨다. 엄마는 마흔 셋을 넘기는 것을 힘겨워했다. 엄마도 외할머니의 뒤를 따라 마흔 셋에 생을 마감할까봐 무척이나 두려워 했고 무던히도 앓았다. 한편으로는 엄마를 그리는 딸의 마음과, 한편으로는 자식들을 지켜야 한다는 모성 사이에서 엄마는 늘 엄마이기를 택했다. 딸이었던 기억이 너무 아득했던 엄마는, 모든 시간 엄마일 뿐이었다. 딸은 엄마 또한 딸이라는 사실을 자주 망각했다.


언제나 날개 밑에 새끼들을 품는 엄마새처럼 자식들을 품고 있지만 엄마도 태어날 때부터 엄마는 아니었음을. 엄마 없는 빈 둥지에서 하염없이 울고 있었을 어린 엄마를. 그래서 악착같이 둥지를 지키고 자식들을 보듬었던 엄마를. 대부분의 자식들은 엄마가 당위적인 존재라 인식한다. 자신이 부모가 되거나 부모가 된 친구들이 많아졌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엄마를, 부모를 다시 생각한다. 그래서 대개는 엄마의 나이가 너무 층층이 누적된 뒤에야 지난 시간을 헤아릴 줄 안다.


엄마는 외할머니의 마지막 나이를 넘긴 후 평온해졌다. 딸은 엄마의 나이가 계속 유예되는 것에 안도한다. 엄마의 회상 속에 외할머니는 마흔 셋에서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 존재이다. 박제된 추억은 더 이상 자라지 않을 것이다. 엄마는 당신의 가슴에 남은 외할머니보다 훌쩍 나이를 먹은 탓에, 예순 넘은 엄마로서의 경험을 낯설어했다. 엄마인 것이 자신없어진 엄마는 가끔 자식들에게 미안해하기도 하고, 엄마로서 잘 해내고 있는지 확인받고 싶어 하기도 했다. 책임감과 본능으로 엄마는 엄마의 역할을 완벽히 수행해 왔다. 딸에게 엄마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는 존재의 집합이다. 엄마가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의 당위성과 딸이 상상할 수 없는 엄마의 부재가 우리 사이에 공존한다.


딸은 엄마와 함께 자라 왔다. 아이스크림 통에 번갈아 숟가락질을 하고 새로 나온 과자를 같이 고르던 엄마. 충치가 생긴다며 초콜렛을 숨겨 놓고 딸 몰래 먹다가 들켜 멋쩍게 웃던 엄마. 자기 전에 볼을 부비던 엄마. 천식으로 기침을 하다가 숨이 멎는구나 생각하던 어느 밤, 갑자기 안방에서 달려와 등을 두드려주던 엄마. 짝사랑하던 남자애의 이야기를 자못 진지하게 들어주던 엄마. 데이트나 소개팅이 있을 때마다 옷장을 헤집에 놓으며 함께 옷을 골라주던 엄마. 딸의 학교 친구들을, 회사 동기들을 매일같이 듣다 보니 만나기라도 한 듯 알고 있던 엄마. 그리고 엄마를 부르며 울먹이던 엄마.


딸이 기억하는 엄마의 모습은 이렇게나 촘촘한 스펙트럼으로 펼쳐지는데, 엄마는 이제 환갑도 훌쩍 지나 자꾸만 나이를 먹어간다. 딸의 시간은 늘 엄마의 시간과 병렬해 왔다. 엄마는 늘 엄마 없는 길을 걸어 와야 했지만, 딸은 엄마 없는 길을 상상할 수 없다. 언젠가는 맞닥뜨리게 될 순간이지만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순간. 딸의 성장을 지켜보는 엄마의 마음과 엄마의 노화를 바라보는 딸의 마음은 가끔 애틋한 눈빛으로 교차된다. 엄마는 딸이 더 이상 자라지 않기를 바라고, 딸은 엄마가 더 이상 나이먹지 않기를 바란다. 영속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매 순간은 항상 소중하다.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의 시간이 더 많이 남았기를 기도하게 된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시간은 모녀에게도 예외 없이 흐르고 우리는 시간 속을 묵묵히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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