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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Sep 13. 2018

김작자를 여행하다: 사춘기(四春記) - 김작자

연남동 소년의 '평행이론'

연트럴파크.

경의선 숲길 연남동 구간의 또다른 이름이다. '핫 플레이스'가 된 이 곳에는 젊은이들과 연인들, 가족들과 관광객들의 발길이 사시사철 끊이지 않는다. 한 때 산업혁명의 산물이고 개화의 상징이던 기차는 이제 초고속 열차나 지하철로 교체되었다. 석탄에서 전기로 추진력이 이동하면서 연기를 내뿜던 선로는 지하에서 조용히, 그러나 빠르게 몇 배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원래 기차가 지나던 자리는 이제 선로의 흔적만 남은 채 도심의 쉼터이자 화려한 놀이터로 변모했다. 철길이 지나는 까닭에 집값이 오를 리 없다고 생각했던 동네는 이제 서울에서 가장 값비싼 동네 중 하나다. 연남동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연남동 소년' 김작자의 삶은 이 연트럴파크와 묘하게 닮았다.


투쟁하는 젊음으로 가득했던 '젊음의 거리'

"제가 국민학교(초등학교의 옛 이름)를 다닐 때만 해도 연남동은 그리 잘 사는 동네가 아니었어요. 서민들의 삶을 그대로 들여다 볼 수 있는 동네였죠.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셨던 아버지와 피아노 학원 원장선생님이셨던 어머니 덕분에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는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의 빈자리를 채운 것은 책이었다. 출판사를 운영하는 아버지 덕에 자연스럽게 책과 글을 가까이하게 된 소년은 혼자서도 잘 노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에게 외로움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이었다. 창서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 등하굣길인 연세대 인근은 늘 시위대가 끊이지 않았다. 어린 소년이 밖에서 뛰어놀기에 적합한 환경은 아니었다.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소년은 더욱 책과 영화를 벗삼을 수밖에 없었다.


"최루탄 연기와 전경들,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대학생들을 늘상 보며 자랐죠. 국민학생이었기에 망정이지 고등학생만 되었어도 시위대로 오인받아 구타당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오싹해요. 그래도 어릴 때부터 최루탄으로 단련되어서인지 군대에 가서 화생방 훈련을 하는데 주위에서 눈물 콧물 흘리며 괴로워할 때 저만 멀쩡하더라고요. 하하."

기차는 어디론가 달려간다. 내성적이고 조용하던 소년의 내면에도 늘 어디론가 떠나보고 싶은 갈증이 있었다.
"시험이 끝난 날은 수업이 일찍 마치잖아요. 그럴 때면 친구와 함께 아무런 버스나 타고 낯선 동네를 가 보는 거예요. 지금이야 인터넷이 발달해서 검색하면 모든 정보가 나오지만 그 때만 해도 버스 노선도 단촐하고 처음 듣는 동네에 대해서는 알려야 알 수 없죠."
모험가의 꿈을 간직한 소년은 대학에 진학해 청년이 됐다.


나란한 철길, 나란한 인생길

대학교 때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김작자는 부모님이 늦은 나이에 얻은 귀한 외아들이었다. 그러나 부모님이 모두 일을 하신 덕에 응석받이가 되기보다는 일찌감치 철이 들어 버렸다. 아내는 삼남매 중 막내딸이다. 귀여움을 독차지 했을 것 같지만 실은 늘 제 차지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삶이었다. 언니와 오빠가 대학을 가자마자 어머니의 병환이 시작되었다. 막내딸은 그간 미뤄온 엄마 품의 차례를 주장할 틈도 없이 제 앞가림을 하느라 분주해야 했다. 속 깊은 두 연인은 잔잔하고 꾸준하게 서로를 지켜 주었다.


"졸업 즈음 언론사 원서를 여러 군데 썼는데 줄줄이 낙방이었죠. 그 때가 2002년, 한창 월드컵 열기로 뜨거울 때였는데 저는 취업과 진로 문제로 한창 힘들 때였어요. 고민 끝에 프리랜서부터 시작해서 점프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죠. 그렇게 해서 한 여성지의 프리랜서가 됐고, 기사를 인정받아 곧 정기자가 되었어요."


4-5년간 잡지사(주부생활)의 연예 기자로 경력을 쌓으며 제법 굵직한 특종도 몇 번 터뜨렸다. 그러나 연예 기사를 위해 다소 비윤리적인 취재 과정도 강요하는 데스크와 자주 마찰을 빚으며 또다시 고민이 쌓여 갔다. 양심과 특종, 윤리와 지시 사이에서 고민하던 그는 노컷뉴스 연예부 기자를 거쳐 SBS 연예 선임기자로 점프를 했다. 드디어 데스크가 된 것이다. 이름 대면 알만한 언론사의 선임기자직에 오르기까지 여정은 쉽지 않았다. 여기에서 돌연 '퇴사'라는 일생일대의 '점프'가 가능했던 것은 아내 덕분이었다.


"아내가 아니었다면 퇴사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기 쉽지 않았겠지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저버릴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아내가 그러는 거예요. 인생 한 번인데 하고 싶은 일 하고 살라고. 그래서 할 수 있었어요. 물론 저도 아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하면 적극 지지해 줄 거고요. 단지 아내는 아직 그런 일을 찾지 못한 것 뿐이죠. 언제가 됐든 아내도 꿈을 찾았다고 하면 그 길을 갈 수 있게 해 줘야죠."


이제 더 이상 기차가 지나지 않아도 선로는 그 자리에 나란히 남아 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서로를 묵묵히 지켜주며 함께 흘러가는 부부의 여정은 기찻길과 닮았다. 부부는 역(逆)이 만난다지만, 이들은 닮은꼴이 만났다. 희로애락의 많은 정거장들을 함께 거쳐온 부부는 앞으로 어떤 역(驛)을 만나든 각자의 역(役)을 든든히 수행할 것 같았다.


세상은 바뀐다, 그러니 나도 바뀌어야겠다

그가 거친 언론사들은 모두 취업준비생과 언론고시생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인 곳이다. 그러나 그는 답답했다. 세상은 빠르게 바뀌고 소비자의 수요 역시 다양하게 바뀌는데 미디어는 바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얘기하면 미디어를 만드는 사람들은 변하지 않았다.


오너(소유주)가 있는 언론사에서 사람들은 언론인의 본분을 하기보다는 오너의 비위를 맞추는 데 급급했다. 미디어에 철학이나 신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눈치보기만 있었다. 대중의 눈높이를 맞추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오너의 취향에 맞추려는 경영진들로 가득했다. SNS와 각종 매체의 발달로 메이저 언론사의 뉴스가 더 이상 '뉴스'가 아닌 시대. 회사가 이대로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는 것이었다. 그는 떠나기로 결심했고, 결심을 실행에 옮겼다. 2018년 9월 1일, 그는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되었다.


"몇 년 더 버틴다고 달라질 것 같지는 않더라고요. 오히려 더 일찍 나오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퇴사에 대한 후회는 없는데 시간에 대한 후회는 많이 들거든요. 하고 싶은 일은 많은데 준비하려니 시간이 많이 들겠더라고요. 연말까지 건강도 챙겨야 하고, 1인 창업가로서 컨텐츠도 쌓아야 하고, 브런치 매거진에 글도 써야 하고, 가족들과 시간도 더 보내야 하고......"


해야 할 일들을 나열하며 그의 얼굴에서는 시종일관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위로나 감동을 주는 글쓰기는 제가 아니더라도 다른 분들이 많이 하시니까 저는 좀 더 쉬운 글쓰기를 보여드리고 싶어요. 완성품의 글보다는 일상을 꺼내어 옮기는 재료 단계부터 점점 글로 발전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그의 말소리와 겹쳐 멀리 경적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연남동 홍대입구 역은 이제 더 이상 경적을 울리는 기차가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상에는 쾌적한 쉼터가 조성되어 있고, 지하에는 2호선, 공항철도, 경의중앙선 3개 노선의 환승지가 위치해 있어 늘 인파가 끊이지 않는다. 첨단 교통수단의 교집합이자 아날로그 감성의 숲길이 함께 모여있는 곳. 가장 새롭고 가장 낯익은 것들이 모인 곳. 소년같은 표정으로 새로운 판을 짜고 있는 김작자의 앞길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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