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너 똑 닮은 애 낳아서 키워봐라
"됐다니까. 그냥 얼른 가."
"이 꼴을 보고 어떻게 그냥 가."
"나 지금 나가야 된단 말이야."
"넌 그냥 볼일 보러 가라니까. 어차피 너 있어봤자 걸리적거리기만 해."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엄마가 집에 들른다. 됐다고 등을 떠밀고 목소리를 높여도 엄마는 굳이 청소를 하고 가겠다며 팔다리를 걷어부친다. 부아가 치밀어오른다. 오늘은 반드시 엄마를 막으리라고 다짐하지만 엄마는 기어이 딸의 등을 떠밀고 당신이 청소를 한다.
엄마가 청소를 하는 것이 싫은 것은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싫기는 커녕 너무너무 좋다! 엄마가 한 번 왔다가면 우렁각시가 왔다간 것처럼 집이 반짝반짝해진다. 바닥에는 먼지 하나 없고 책장이며 침대 밑이며 싱크대도 모두 구석구석 빛난다. 어째서 내가 할 때는 그처럼 산만하다가 엄마의 손길이 스치고 나면 마법처럼 빛이 나는 것일까.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싫은 날도 많다. 나도 집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진심어린 혼잣말을 할 때도 많다. 특히 분리수거 하러 내려가기 귀찮거나 음식물을 처리해야 할 때에는 누군가 집안일을 좀 대신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여자라고 사회생활이 면제되는 시대가 아니다. 경제활동과 가사노동이 모두 여자의 몫이 되는것이 버겁다는 두려움을 뒤집어 보면 가사노동의 고단함이 경제활동에 뒤지지 않는다는 판단이 기저에 있다. 가사도우미를 쓸 정도의 평수는 단연코 아니며, 조금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면 충분히 관리에 무리가 없는 세간살이다. 청소에 대한 애착도 조금은 있다. 주말 이틀 중 하루는 혼자만의 청소 시간을 가진다. 나름의 의식이라고나 할까. 흰 빨래, 검은 빨래, 수건 등을 나누어 빨고 보이는 바닥면이라도 물걸레질을 해 주면 속이 후련하다. 요리를 즐기지 않는 것 역시 모처럼 깨끗하게 치워 둔 부엌을 다시 어지럽히기 싫기 때문이라 항변한다. 이처럼 힘겨운 청소가 엄마라고 즐거울 리 없다. 딸의 집보다 훨씬 큰 집을 매일 혼자 청소하고 세 식구의 빨래도 혼자 하면서 음식까지 해야 하는 엄마에게 딸 집의 청소까지 맡기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도리질을 한다.
손을 내젓고 성을 내고 우는 얼굴까지 해 보아도 엄마와의 실랑이는 늘 딸의 패배로 끝난다. 엄마의 굳은 의지를 꺾기 어렵기 때문인지, 내심 엄마가 청소를 해 주는 것이 미덥고 든든하기 때문인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엄마가 청소를 해 주고 나면 집에 광이 난다는 것, 그래서 적어도 며칠간은 집에 돌아와서 기분이 좋다는 것이다. 어쩌면 엄마에게 됐다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엄마가 청소하러 오겠다고 말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리 만류해도 결국은 엄마가 집을 윤이 나게 만들어 줄 것을 알기에 엄마를 말리는 시늉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 너무 나쁜 딸인 것 같은데 실제로 내가 그 나쁜 딸인 것 아닐까. 물론 세상에 공짜는 없다. 대가로 몇 바가지의 잔소리를 두고두고 들어야 할 것이다.
"아휴, 방인지 돼지우리인지 모르겠더라고."
"그럼 돼지가 기분 나쁘지. 돼지도 쟤가 어질러놓은 걸 보면 못살겠다고 나갈 거야."
엄마와 아빠는 맞장구를 치며 합동 공격을 할 것이다. 넌 언제 사람이 될 거냐, 는 부모님의 잔소리에 딸은 심드렁히 백일동안 쑥과 마늘을 먹어보지 뭐, 라고 응수해 더 큰 잔소리의 무한 루프를 이끌어낼 것이다. 그래도 빨래를 널어 놓은 방식에서, 청소기를 둔 위치에서, 옷을 개어둔 모습에서 엄마의 흔적이 보이는 것이 좋다. 엄마가 바로 옆에서 잔소리를 하는 효과는 덤이다. 이런 덤은 글쎄, 내가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역시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엄마는 모든(은 아닌가?) 자녀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을 꼭 후렴처럼 붙인다.
"나중에 너 똑 닮은 애 낳아서 키워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