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의 계절

by 데이지

10월은 사과의 계절이다. 이 즈음이면 사과 산지로 유명한 경북 문경이나 안동에서는 사과 축제가 한창일 것이다. 지역 농협에 가면 발그레하게 빛나는 햇사과가 한가득 쌓여 있을 것이다. 서울의 청과점에도 그 사과가 유입된다. 박스에, 봉지에, 투명 플라스틱 상자에 담겨 사과들은 볼을 붉히고 있다. 희고 붉은 저 과일은 모양도 맛도 참으로 단아하고 사랑스럽다. 아삭, 하고 베어 무는 소리와 사각한 식감도 즐겁다. 새콤달콤한 사과는 저장성도 좋아서 다른 과일보다 무르거나 상할 염려 없이 비교적 오래 먹을 수 있다. 사과 껍질에서 수분이 빠지려는 기미가 보이거나 멍이 많이 든 과실은 따로 모아 사과잼이나 사과청을 만들면 된다. 설탕을 탈탈 붓고 은근한 불에 졸이면 달큰한 냄새가 온 집에 가득 찬다.

사과철은 단풍철과도 겹친다. 재작년, 엄마와 함께 단풍 여행을 떠났다. 3박 4일의 일정이었다. 경주로 갈까 하였으나 당시는 한창 지진의 여파가 남아 있을 무렵이었다. 여행지는 안동으로 정해졌다. 서울 외의 지역에 연고도 없고 아는 바도 없기에 어디를 가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단풍과 신라 유적지의 조합을 보려던 계획이 단풍과 도산서원의 조합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엄마는 한사코 엄마가 운전을 하겠다고 했고 서른 넘은 딸은 예순 넘은 엄마가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앉아서는 연신 군것질을 했다. 가는 길에 문경에 있는 리조트에서 1박을 하고, 안동에 있는 호텔에서 2박을 하는 일정이었다. 3박 4일은 국내의 한 지역을 여행하기에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이다. 모녀의 여행에는 별다른 계획이랄 것도 없었다. 그저 단풍 구경을 하며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려는 것 뿐이었다.


안동에 가는 길에 우연히 사과밭을 지났다. 잘 익은 사과들이 탐스럽게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엄마는 밭에서 갓 딴 사과를 사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주인을 찾았다. 제법 우두커니 기다렸으나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다시 길을 가려던 찰나 밀짚모자를 쓴 아저씨가 나타났다.
"뭐 찾아요?"
"사과를 좀 사고 싶어서 그러는데..."
"직접 따 가세요."
아저씨는 박스를 내밀며 말했다. 작은 박스는 2.5 kg , 큰 박스는 5kg 라고 했다. 박스에 양껏 담아서 담을 수 있는 만큼 담아 가라고 했다.
"쉬워요. 그냥 이렇게 꼭지를 한 번 살짝 꺾어주면 됩니다. 제철이라 다 잘 익었으니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가요. 이런 거 맛있겠네."
아저씨는 한두 개를 시범삼아 따 주고는 다시 저만치로 물러섰다. 서울 촌사람으로서는 사과따기 체험을 해 볼 기회가 없었다. 모녀는 배운 대로 신나게 사과를 땄다. 2.5kg 짜리 상자 두 개를 하나씩 안고 오며 아이처럼 들떴다.


과수원 주인은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물었다.
"서울서 왔습니까"
"네"
"저도 서울서 직장 다니다 몇 년 전에 귀농했습니다. 제가 안동 권씨거든요. 올해는 사과가 풍년이요. 안동 사과는 특히 달아요. 한 번 맛보면 다른 사과 못 드십니다."

아저씨는 작은 사과 하나를 따서 건네 주었다. 갓 딴 사과는 냄새부터 상큼했다.

"이 사과가 참 고마운 과일이에요. 키우기가 쉬워서 귀농한 지 얼마 안 된 사람들도 실패를 덜 하니까요. 그래서 사과값이 자꾸 내려가긴 하지만."
부인과 아이들이 안동에 내려오는 것에 대해 처음에는 걱정이 많았지만 지금은 더 기뻐한다고 했다. 농사는 이문이 많이 남지는 않지만 정직하다고. 아들놈 둘이 흙투성이가 되어 놀다 온다고.
"집사람이 고맙지요. 서울서만 살던 사람이 심심할텐데."
엄마는 사과값을 후하게 쳐 드렸고 아저씨는 사과 한 봉지를 더 싸 주었다. 우리는 여행 내내 사과를 원없이 먹었다.


안동에서 도산서원과 병산서원도 보고, 단풍 구경도 실컷 하였다. 하회마을과 류씨 고택도 보고, 헛제삿밥과 간고등어도 먹었다. 안동 시내에 가서 유명하다는 빵집도 가고 맛집도 가 보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 수록 선명히 남는 장면은 사과밭에서의 일이다. 사과밭은 우연히 들른 것이기에 사진 한 장 찍지 않았다. 사과 따는 모습을 연출이라도 해서 찍었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생긴 것은 최근이었다. 발이 쑥쑥 빠지는 흙을 밟고 들어가 장갑도 모자도 없이 맨손으로 사과를 따며 몹시 신이 났다. 씻지도 않은 손으로 갓 딴 사과를 옷에 슥슥 문질러 바로 베어 먹을 때, 흐르는 물에 몇 분 씻거나 식초물에 담가두어야 한다는 평소의 상식은 까마득히 잊었다. 사과밭에서 아이가 되었던 모녀는 이후의 여행에서는 다시 어른으로 돌아갔다.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사과를 잘 씻어서 먹었던 것이다.

다시 사과의 계절이 올 것이다. 바뀐 부서는 사과가 영글 무렵이면 무척이나 바빠져서 휴가를 내고 느긋하게 여행을 다녀 올 엄두를 낼 수 없다. 엄마는 일 년이 다르게 나이를 먹어 간다. 자주 무릎이 아프다고 하시고, 자주 머리가 시리다고 하신다. 여름에도 머리가 시렵다며 모자를 쓰시고, 좋아하던 초콜릿도 잘 드시지 못한다. 자꾸 걸음이 느려지고 조금씩 야위어가는 엄마를 보며 다시 엄마와 그런 여행을 가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음을 막연히 깨닫는다. 엄마와 사과를 땄던 그 날의 기억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사실, 엄마에게 늘 사과(謝過)만 하며 살았다. 더 자랑스러운 딸이 되지 못해 미안했고 사위며 손주가 아직도 없어 죄송했다. 늘 걱정만 끼쳐 드리면서도 늘 큰소리를 치고 심통을 부리는 뻔뻔한 딸인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사과(謝過)가 아닌 사랑과 감사(感謝)를 전할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이 남았기를. 시간이 많이 지난 날에 사과는 엄마를 기억나게 하는 생각의 과일(思果)이 될 것을 알기에, 과수원 아저씨처럼 내게도 흔하고 흔한 이 열매가 무척이나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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