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조남주(민음사)

by 소연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가며
당연하다 여기는 것들이 있다.
아니,
당연하다는 생각 조차 못 할 만큼
그냥 자연스레 몸과 맘에서 배어 나오는
본능같은 생각과 행동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본능이 아니다.

그저 길고 긴 시간, 오래고 오랜 세월동안
꾸준히 강요받고, 학습되어진
세뇌로 인한 행동양식이었던 것이다.




1982년 4월 1일 생, 김지영.....

단 한번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그녀는
죽은 선배언니의 목소리로,
그 역시 여자라는 죄인으로 산 어머니의 목소리로,
모든 살아있는 김지영과 이미 죽은 김지영의 목소리로
항변하고, 분노하고, 토로하고, 소리쳤다.

과연 김지영은
오랜 세월 축적되어 만들어졌을지 모를
<여자라면 당연히> DNA를
소멸시킬 수 있을까?
다음 세대의 김지영들에게
유전시키지 않을 수 있을까?

.
.
.

하아...........






"나도 선생님이 되고 싶었는데."
엄마는 그냥 엄마만 되는 줄 알았던 김지영 씨는 왠지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아 웃어 버렸다.
"진짜야. 국민학교 때는 오 남매 중에서 엄마가 제일 공부 잘했다. 큰외삼촌보다 더 잘했어."
"근데 왜 선생님 안 했어?"
"돈 벌어서 오빠들 학교 보내야 했으니까. 다 그랬어. 그때 여자들은 다 그러고 살았어."
"그럼 선생님 지금 하면 되잖아."
"지금은, 돈 벌어서 너희들 학교 보내야 하니까. 다 그래. 요즘 애 엄마들은 다 이러고 살아."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을, 김지영 씨의 어머니가 된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치맛자락 끝을 꾹 밟고 선 작지만 묵직하고 굳건한 돌덩이. 김지영 씨는 그런 돌덩이가 된 기분이었고 왠지 슬펐다. 어머니는 김지영 씨의 마음을 알아채고는 너저분하게 흐트러진 딸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다정하게 넘겨 주었다.
-p.36~37-
....그 때는 몰랐다. 왜 남학생부터 번호를 매기는지. 남자가 1번이고, 남자가 시작이고, 남자가 먼저인 것이 그냥 당연하고 자연스러웠다. 남자 아이들이 먼저 줄을 서고, 먼저 이동하고, 먼저 발표하고, 먼저 숙제 검사를 받는 동안 여자아이들은 조금은 지루해하면서, 가끔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전혀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으면서 조용히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주민등록번호가 남자는 1로 시작하고 여자는 2로 시작하는 것을 그냥 그런 줄로만 알고 살듯이.
-p46-
여자는 다행이라며 대뜸 학생 잘못이 아니에요, 했다. 세상에는 이상한 남자가 너무 많고, 자신도 많이 겪었다고, 이상한 그들이 문제지 학생은 잘못한 게 없다는 여자의 말을 듣는데 김지영 씨는 갑자기 눈물이 났다. 꺽꺽 울음을 삼키느라 아무 대답도 못하는 김지영 씨에게 전화기 너머의 여자가 덧붙였다.
"근데, 세상에는 좋은 남자가 더 많아요."
-p.69-
김은영 씨는 다녀왔던 교대에 원서를 냈고, 합격했다. 기숙사에도 합격했다. 스무 살,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딸 앞에 간단한 살림살이들과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당부들을 늘어놓고 돌아온 어머니는 김은영 씨의 빈 책상에 엎드려 한참을 울었다. 그래도 아직 어린애인데 집에서 내보내는 게 아니었다고, 정말 가고 싶은 학교에 가도록 두었어야 했다고, 나처럼 만들지 말아야 했다고. 딸이 안쓰러운 건지 어린 시절의 자신이 안쓰러운 건지 알 수 없었다.
-p.74~75-
시간이 늦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일을 앞두고 조바심 내면서 헤매기 싫어 곧바로 택시를 탔다. 머리를 말끔하게 빗어 넘긴 할아버지 기사님은 룸미러로 김지영 씨를 한번 흘끔 보더니 면접 가시나 보네, 했다. 김지영 씨는 짧게 네, 하고 대답했다.
"나 원래 첫 손님으로 여자 안 태우는데, 딱 보니까 면접 가는 것 같아서 태워 준 거야."
태워 준다고? 김지영 씨는 순간 택시비를 안 받겠다는 뜻인 줄 알았다가 뒤늦게야 제대로 이해했다. 영업 중인 빈 택시 잡아 돈 내고 타면서 고마워하기라도 하라는 건가. 배려라고 생각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무례를 저지르는 사람. 어디서 부터 어디까지 항의를 해야 할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고, 괜한 말싸움을 하기도 싫어 김지영 씨는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p.100~101-
당장 눈에 보이는 효율과 합리만을 내세우는 게 과연 공정한 걸까. 공정하지 않은 세상에는 결국 무엇이 남을까. 남은 이들은 행복할까.
-p.123-
"예전에는 방망이 두드려서 빨고, 불 때서 삶고, 쭈그려서 쓸고 닦고 다 했어. 이제 빨래는 세탁기가 다 하고, 청소는 청소기가 다 하지 않나? 요즘 여자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더러운 옷들이 스스로 세탁기에 걸어 들어가 물과 세제를 뒤집어쓰고, 세탁이 끝나면 다시 걸어 나와 건조대에 올라가지는 않아요. 청소기가 물걸레 들고 다니면서 닦고 빨고 널지도 않고요. 저 의사는 세탁기, 청소기를 써 보기는 한 걸까.
-p.148~149-
어떤 분야든 기술은 발전하고 필요로 하는 물리적 노동력은 줄어들게 마련인데 유독 가사 노동에 대해서는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전업주부가 된 후, 김지영 씨는 '살림'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이중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때로는 '집에서 논다'고 난이도를 후려 깎고, 때로는 '사람 살리는 일'이라고 떠받들면서 좀처럼 비용으로 환산하려 하지 않는다. 값이 매겨지는 순간, 누군가는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겠지.
-p.149-
".....죽을 만큼 아프면서 아이를 낳았고,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전부 포기하고 아이를 키웠어. 그랬더니 벌레가 됐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돼?"
-p.165-
아내는 수학 영재였다. 학창 시절 내내 온갖 수학경시대회를 휩쓸었고, 고등학교 3년 동안 열두 번의 중간•기말고사 모두 수학 만점이었고, 학력고사에서는 안타깝게 수학을 한 문제 틀렸다고 했다. 그런 사람이 왜 초등 수학 문제집을 그렇게 풀어 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유를 묻자 아내는 재밌어서, 라고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당신 수준에 그게 뭐가 재밌니? 유치하기만 하지."
"재밌어. 엄청 재밌어. 지금 내 뜻대로 되는 게 이거 하나밖에 없거든."
-p173~174-









​* 보탬 : 나는 1976년 4월 1일 생, 김지영입니다.
나의 엄마는 1950년 3월 5일 생, 김지영이고,
함께 사는 시할머니는 1931년 12월 4일 생, 김지영입니다.

당신은,
몇 년 몇 월 몇 일 생, 김지영입니까?
우리의 딸들도
여전히 김지영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