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옥(민음사)
너무나도 아름다운 표현과, 시리도록 섬세한 문장이
눈과 머리와 가슴을 단번에 물들이는......
어쩌면, 그의 언어 상실은,
보통 이들이 평생을 두고도 표현하지 못할 만큼의 언어감에 대한 신의 질투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장소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그렇기에 숨을 수 있고,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는 위안과 재정비의 장소인 무진.....
내 안의 무진은 어디인가? 누구인가? 무엇인가?
결국 인간의 허무와 외로움은 그 누구도 구원해주지 못하는,
혼자서 감당하고 극복해야 할 불가침의 영역이다.
1960년대의 삶이란,
얼마나 많은 오해와 오해의 무덤 속에서
나름의 꿈틀거림으로 살아있음을 울부짖어야 했단 말인가.....
어른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때로
떳떳치 못한 상황에마저 정당성을 부여하고,
그릇된 행위마저 영웅담으로 미화시킨다.
성장은 결코 자연스럽거나 아름답지 않다.
★ '무진기행'의 첫 안개를 읽을 때부터 김승옥의 마법에 걸려버렸다. 그 다음 소설, 그 다음 소설, 그 다음 소설을 읽으며 나는 기어코 책을 덮을 수 밖에 없었다. 김승옥은 빌려선 안된다. 소장해야 한다. 김승옥 전집을 장바구니에 담고, 요 며칠 한껏 설레어 주리라. 예쁜 꽃 피는 봄날, 내 생일 선물로 두 손에 받아들리라.
소설이란 추체험의 기록,
있을 수 있는 인간관계에 대한 도식,
구제 받지 못한 상태에 대한 연민,
모순에 대한 예민한 반응,
혼란한 삶의 모습 그 자체.
나는 판단하지도 분노하지도 않겠다.
그것은 하느님이 하실 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의미 없는 삶에
의미의 조명을 비춰 보는 일일 뿐.
-1980년 작가의 말-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p.10~11 무진기행-
그들은 이제 점점 수군거림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들어 가고 있으리라. 자기 자신조차 잊어버리면서, 나중에 그 소용돌이 밖으로 내던져졌을 때 자기들이 느낄 공허감도 모른다는 듯이 그들은 수군거리고 수군거리고 또 수군거리고 있으리라. 바다가 있는 쪽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p.17 무진기행-
박은 가고 나는 다시 '속물'들 틈에 끼었다. 무진에서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은 모두 속물들이라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이 하는 모든 행위는 무위(無爲)와 똑같은 무게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장난이라고.
-p.24 무진기행-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 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전보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나는 거기에 내 새끼손가락을 걸어서 약속한다. 우리는 약속했다.
-p.41 무진기행-
추억이란 그것이 슬픈 것이든지 기쁜 것이든지 그것을 생각하는 사람을 의기양양하게 한다. 슬픈 추억일 때는 고즈넉이 의기양양해지고 기쁜 추억일 때는 소란스럽게 의기양양해진다.
-p.44 서울 1964년 겨울-
"밤거리에 나오면 뭔가 좀 풍부해지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뭐가요?"
"그 뭔가가. 그러니까 생(生)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난 김 형이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내 대답은 이렇습니다. 밤이 됩니다. 난 집에서 거리로 나옵니다. 난 모든 것에서 해방된 것을 느낍니다. 아니,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느낀다는 말입니다. 김 형은 그렇게 안 느낍니까?"
"글쎄요."
"나는 사물의 틈에 끼어서가 아니라 사물을 멀리 두고 바라보게 됩니다 안 그렇습니까?"
"글쎄요, 좀......"
"아니, 어렵다고 말하지 마세요. 이를테면 낮엔 그저 스쳐 지나가던 모든 것이 밤이 되면 내 시선 앞에서 자기들의 벌거벗은 몸을 송두리째 드러내 놓고 쩔쩔맨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의미가 없는 일일까요? 그런, 사물을 바라보며 즐거워한다는 일이 말입니까?"
"의미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난 무슨 의미가 있기 때문에 종로 2가에 있는 빌딩들의 벽돌 수를 헤아리는 일을 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렇죠? 무의미한 겁니다. 아니 사실은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지만 난 아직 그걸 모릅니다. 김 형도 아직 모르는 모양인데 우리 한번 함께 그거나 찾아볼까요. 일부러 만들어 붙이지는 말고요."
-p.51 서울 1964년 겨울-
"김 형과 나는 서로 다른 길을 걸어서 같은 지점에 온 것 같습니다. 만일 이 지점이 잘못된 지점이라고 해도 우리 탓은 아닐 거예요."
-p.52 서울 1964년 겨울-
형과 어머니는 주고받는 시선 속에서 우습도록 차디찬 오해를 나누고 있었다. 그뿐이다. 그뿐이다. 둘 다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뿐이다. 상상의 바다를 설정해 놓고 그곳을 굳이 피하려고 하는 뱃사람들처럼 어머니와 형도 간단하게 살아갈 수는 없었던 것인가.
-p.95 생명연습-
"정순의 죽은 얼굴을 보고 내가 울까?"
"물론 안 우시겠죠."
"......"
"......"
"그렇다면 갈 필요가 없을 것 같군."
옳은 말씀이다. 이제 와서 눈물을 뿌린다고 해서 성벽이 쉽사리 무너져 날 것 같지도 않은 것이다.
"슬프세요?" 내가 웃으며 물었더니
"글쎄, 지금 생각 중이야."라고 대답하셨다. 나는 할 수 없이 또 한 번 웃고 말았다.
-p.99 생명연습-
그 시체가 눈앞에 떠올랐다. 문득 애착이 가는 환상. 시체가 손발을 쭉 뻗고 엎드린 그 자세대로 공중을 둥둥 떠서 팔을 벌리고 서 있는 아버지에게로 날아오고 있다. 공중을 느릿느릿 비행해 오는 시체는 가느다란 바람에도 흔들린다. 우선 시체의 머리카락이 쉬임 없이 흩날리고 그럼으로써 시체는 그가 지니고 있던 모든 잡된 요소를 바람에 실려 보내 버리고 이제야 태어나기 전의 사람 아니 모든 것을 살았기 때문에 가장 가벼워져서, 마치 병아리의 노오란 한 개의 깃털처럼 가벼워져서 공중을 나는 것이다. 그건, 부모나 친척이 아무도 없는 한 고아가 자기를 맡아 주겠다고 나선 사람에게 약간 두려워하는 눈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고 있는,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오는 그런 환상이었다.
-p.113~114 건(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