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석제(창비)
나를 아는 이가 없는 곳으로 이사하고 싶던 때가 있었다.
그곳에서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살고 싶다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도 문득문득 낯설고 생경한 곳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단 생각이 올라온다.
그런 생각이 들 때는 대부분 관계에 지쳐 있을 때이다.
관계가 마음처럼 흘러가지 않을 때
사람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
관계를 끊고 관계 밖으로 나오거나,
관계를 유지하되 스스로를 고립하거나.....
어떤 선택을 하든 결론은 똑같이 ‘외롭다’.
자의든 타의든 인간은 투명인간이 된다.
투명인간이 되면 상처도 사라지리라 기대하지만
천만의 말씀....
단지 잠시 투명해졌을 뿐, 상처는 그 자리에 그 통증 그대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투명해지고 싶은 건
외로워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싶은 것 역시
외로워서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근원 가장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외로움’인가보다.
한 집안이 있다.
5대에 걸친 그 가족들의 이야기가
봉인된 두루마리 펼쳐지듯 휘리릭 펼쳐진다.
그들은 각자의 시절을 치열하게 살았다.
그냥 치열하게만 살았다.
그들의 치열함에 비해 삶은 참 차갑기 그지없다.
격동의 시대에 아파하고, 격변의 시대에 발 맞추려 애쓰며
김씨 집안 5대는 우리 나라 근현대사의 가시밭을
악착같이 기어 살아남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을 기억하지 않는다.
그들은 투명인간이다.
나 역시 투명인간이다.
얽히고 섥힐 것이 너무나도 많아진 지금의 세상에서
끊임없이 외로움과 싸우고 있는
나는,
당신은,
우리는,
투명인간이다.
내가 뭘 알겠는가. 호호백발의 시어머니하고 어린 아들 충현이 붙들고 우는 게 일이었다. 소 팔고 땅 팔고 해서 변호를 한 끝에 남편은 이태 만에 풀려나긴 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가혹한 고문을 받고 감옥생활을 하느라 심신이 다 성치 못한 상태였다. 감옥 밖에서는 다 큰 과로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상범이자 요시찰 인물로 낙인찍혀 독사 같은 특고경찰들이 시도 때도 없이 집으로 쳐들어와서 남편이 누워 있는 이불과 담요까지 뒤집어엎고 여차하면 다시 잡아간다고 을러대는 게 다반사가 되었다. 정신이 온전치 않은 남편이 이상한 대답이라도 하게 되면 남편은 고사하고 집안이 거덜날 판이라 시아버지가 그때마다 그놈들에게 쥐여주고 안겨준 돈이 수월치 않았다. 그들의 악마 같은 등쌀에 시달리다 못해 남은 재산이 또 사탕처럼 녹아 없어졌다. 결국 누가 봐도 부러워할 부잣집 장자였던 시아버지가 속병, 화병을 앓다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p.17~18-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한정된 자원이라는 생존조건 속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의 몫을 내가 빼앗기 위해서는 배신, 속임수, 회유나 설득을 위한 정치기술을 사용하고 폭력이나 살인 같은 범죄조차 불사해야 한다. 그런 인간만이 적자로 생존할 수 있다. 나의 피에는 그러한 적자의 유전자가 들어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도 믿을 수 없다.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우선하게 되어 있다. 모두가 모두에게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으로 대할 수 밖에 없다. 가족, 친구, 연인 간의 사랑도 자신의 생존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기 위한 장치일 따름이다. 내가 거기에 연연할 필요가 있는가.
-p.244~245-
상처에서 나는 진물처럼 눈물이 흐르고 흘렀다.
-p.274-
보이지 않는 인간은 스스로를 투명하다고 믿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착각, 맹신, 오해이거나 그저 이야기에 불과하거나. 사람들은 그런 데서라도 희망과 위안을 찾으려 하니까. 신화와 동화, 민담은 그래서 생겨났다. 이룰 수 없는 희망을 이야기로 바꾼 것이다. 이야기는 비록 이루어질 수 없다 해도 달콤한 위로가 되어준다. 그래서 허망한 줄 알면서도 인류는 아직 이야기로부터 젖을 떼지 못했다.
-p.364-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을 때에도 가만히 참고 좀 기다리다보면 훨씬 나아져요. 세상은 늘 변하거든요. 인생의 답은 해피엔딩이 아니지만 말이죠.
-p.367-
죽는 건 절대 쉽지 않아요. 사는 게 오히려 쉬워요. 나는 포기한 적이 없어요.
-p.369-
현실의 쓰나미는 소설이 세상을 향해 세워둔 둑을 너무도 쉽게 넘어들어왔다. 아니, 그 둑이 원래 그렇게 낮고 허술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만들었다.
소설은 위안을 줄 수 없다.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 함께 느끼고 있다고, 우리는 함께 존재하고 있다고 써서 보여줄 뿐.
이 소설의 첫 문장을 쓰기 시작한 이후 깨달은 것은 이것이다.
-p370 <작가의 말>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