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원(달)
아주 특별하지도,
그렇다고 아주 하찮지도 않은
딱 보통의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수많은 생각들, 감정들......
마치 내 생각을, 내 마음을 들여다 보고
그랬잖아~ 그래서 그렇더라....
하며 말을 건네는 듯 한 그의 글이
마음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킨다.
더 큰 꿈, 더 밝은 희망을 강요하는
요즘 세상에서
평범하고 별 일 없이 살아가는
(어찌보면 무미건조함의 연속인)
우리에게,
이 또한 괜찮은 삶이라고
등 한번 쓸어주는 듯 하다.
괜찮다.
이만하면
잘 살아가고 있다.
나는 손 잡는 것을 좋아한다.
모르는 남녀가 거리낌 없이 하룻밤을 보내는 원 나잇 스탠드가
요즘처럼 횡행하는 세상에서도
누군가와 손을 잡는다는 행위가 여전히 특별할 수 있다는 것.
그 느낌이 이렇게나 따뜻하고 애틋할 수 있다는 것이
나는 눈물겹다.
p.14
절대로 드러나지 않을 만큼 안전한 비밀은 사생활이 되고 위험에 노출되는 순간 그것은 컴플렉스가 되어버린다. 컴플렉스에 맞닥뜨렸을 때 사람들은 그것에 대처하기위해 각양각색의 노력을 하게 되는데 결국 이 모든 것들은 사생활이 사생활에 머물러 있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비극이다. 나에겐 내가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모든 과정과 비밀이 안전하게 보호된 채 내가 드러내도 괜찮다고 승인한 모습만 세상에 보여줄 권리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위태로워질 때 우리는 커다란 스트레스를 받는다.
p.34
누구를 만나러 갈 때 신이나지?
그 사람이 바로 친구다.
p.89
현실은 고통스럽고 꿈속의 사막은 달콤하다. 그렇기에 나는 사막을 꿈꾸는 노래를 짓고 부른다. 고통이 아니었던들 내게 평화로운 삶 같은 것들이 의미를 가질 수 있었을까. 생의 중요한 것들이 이처럼 고통 속에서 주어진다는 사실이 내겐 아직도 낯설게 느껴진다.
p.93
사과의 본질이 그런 인간의 시각과 입장에서 보는 것과는 다른 고유의 존재적 특질을 가졌을 것이라는 발상 자체가 또다른 인간중심적 상상력의 결과는 아닐까? 대체 사과의 본질이 무엇인지, 사과의 본질이 정말로 있기는 한 것인지, 사람이 사과의 입장이 될 수 없는데 그 누가 어떻게 알아낼 수 있단 말인가. 설사 사과가 된다 한들 나조차도 내가 누군지, 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다는 것인가.
p.108~109
얼마 전 개통된 경춘 고속도로 덕분에 강원도로 가는 길은 빨라졌고 단순해졌다. 돌이켜보면 강원도로 가는 길만큼 많은 변화를 거쳐 온 곳도 드문 것 같다. 어릴 적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강원도엘 가려면 대관령이든 미시령이든 입맛 따라 택한 꾸불꾸불 산 고갯길을 핸들을 이리저리 수백 번씩 꺾어가며 힘겹게 올라 넘어가야 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힘든 길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눈 앞에 속초의 바다 수평선이 펼쳐지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는 새로 뚫린 도로들이 그 모든 산과 고개의 과정을 생략케 하고 이처럼 손쉽고 빠르게 강원도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으니, 상투적인 생각에서가 아니라 정말로 그러한 방식이, 그런 강원도에 대한 빠른 접근이 강원도를 보다 강원도답게 느끼게 해줄 수 있을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여행이라는 것이 목적지가 전부인 것은 아닐 텐데. 여행지로 가는 과정 또한 여행의 일부일 텐데. 무언가 아쉬움이 느껴졌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과정의 간편함이란 언제나 결과물의 만족감을 떨어뜨리는 역할을 해왔다.
p.159~160
누군가에게 '당신은 소중한 존재'라고 말해주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다. 사람의 인생이 공평한 지위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뿐더러 귀하고 대접받는 삶을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날 때부터 하찮거나 혹은 별 볼일 없는 존재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책들이 희망을 노래하고 거의 강요에 가까운 긍정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사람이란 저마다 타고난 인격과 재능에 격차가 있고, 그것을 가지고 각자 귀천이 분명한 직업을 선택하게 되며, 그에 따라 개개인의 사람이 품을 수 있는 꿈의 한계 또한 정해져 있다. 세상의 감춰진 진실이 이러할진대 그러나 사람들은 그러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목도하길 원하지 않는다.
p.191
나는 희망을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이 무섭다. 희망 이후의 세계가 두렵기 때문이다. 절망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혹여 운 좋게 거기서 벗어났다 한들 함부로 희망을 이야기하기엔 조심스러운 사람이 될 것 같은데, 세상엔 그에 아랑곳하지 않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은가보다.
p.192
미련이 많은 사람은 인생이 고달프다고 한다. 사람은 때로 받아들일 수 있는 건 받아들이고 체념하는 자세를 배울 필요가 있어서 '나에게 허락된 것이 이만큼이구나' 인정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야 제명에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 산다는 건 그저 약간의 안도감을 가지고 시내 대형서점에 들러 책 한 권을 고르는 일에서도 충분히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이 가족중에 암에 걸린 사람이 없는 것, 빚쟁이들의 빚 독촉 받을 일이 없는 것, 먹고 싶은 라면을 지금 내 손으로 끓여먹을 수 있다는 하찮은 것들뿐이라 해도 누가 뭐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복의 크기가 결코 작은 것 또한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만약 체념에서 비롯된 행복이라면, 더 많은 것을 갖고 싶고, 하고 싶은데 그 모든 욕망들을 어쩔 수 없이 꾹꾹 누르고,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많은 영화에 일찌감치 백기를 든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라면 그건 자신에 대한 기만이 아닐까.
p.192
자, 자신이 보통의 재능과 운명을 타고난 그야말로 보통의 존재라는 것도 알았고, 세상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며 세월이 갈수록 나를 가려주던 백열등이 수명을 다해 가고 있음도 직시하게 된 지금.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나의 남은 날들을 어떻게 살아가게 될 것인가.
p.193
당신이 만약 예술을 하고 싶다면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강하게 개입되어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게 진짜 공붑니다.
p.198
어릴 적 비슷한 말, 반대말을 공부할 때 얻는 것의 반대말은 잃는 것이라 배웠는데 이 둘의 강도가 왜 서로 등치되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왜 같은 값이면 기쁨보다는 슬픔, 혹은 불안, 걱정이 더 센 것이며 사랑보다 미움과 원망이 더 진하고, 획득하는 것보다 상실이 더 크게 와 닿는 것일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운동경기와 달리 인생이란 공격보다는 수비가 더욱 중요한 일일지 모른다고. 한 열 배쯤.
p.228~229
저는 하루하루가 희망으로 넘쳐흐른다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로 의아한 생각이 들어요.
희망이란 절망 속에서 생기는 것인데
저렇게 희망만이 가득한 사람의 희망이란 대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죠.
희망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에요. 희망은 저에게도 몹시 필요하죠.
다만, 세상의 이름난 희망의 전도사들이 조금 더 세련된 방법으로
희망을 수혈해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대책 없이 세상만사가 너무나 행복하고 하루하루가 그저 기쁨이고
복되기만 하다는 식으로 얘기하면 잘 받아들여지지가 않거든요.
저도 희망이 필요해서, 받고 싶어서 그래요.
p.254~255
진정으로 굳은 결속은
대화가 끊기지 않는 사이가 아니라
침묵이 불편하지 않은 사이를 말한다.
p.296
사람이 거의 일생동안 컴플렉스의 지배를 받는 것,
다른 사람들의 평판의 지배를 받는 것,
어떤 종류의 것이든 공포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 끔찍하다.
숨겨도 솔직해도 어쨌든 벗어날 수 없다는 건 더더욱 절망적.
그러나
어쩌면 사람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에 대해 관심이 없는지도 모른다.
p.3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