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고요가 '내용의 빈곤'은 아닐까
나는 누구와 있어도 주로 '듣는 쪽'이 되는 사람이다.
상대와의 만남이 지루해서가 아니다. 그저 딱히 할 말이 없다는 생각이 자주 들 뿐이다. 가끔 흥미로운 주제가 나오면 아드레날린이 솟구쳐 대화를 주도하기도 하지만, 화제의 중심이 되는 일은 드물다. 어쩌면 나는 태어나길 '말 없는 사람'으로 태어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할 말이 없다는 건 생각이 없다는 뜻일까?
그보다는 굳이 장황하게 설명하기 귀찮거나, 나의 일상이 타인에게 화젯거리가 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돌이켜보면 우리 가족은 서로의 일상을 미주알고주알 공유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오늘 어땠니?"라고 묻거나 과정의 감정을 쏟아내는 일 없이도 우리는 충분히 편안했다. 드라마에서 보는 끈적하고 얽히고설킨 관계망 대신, 공간은 공유하되 각자의 고요를 존중하는 것이 우리 가족의 방식이었다.
그래서인지 결혼 후 마주한 시댁의 풍경은 낯설고 당혹스러웠다. 식사 후에도 부모님 댁으로 자리를 옮겨 차와 과일을 몇 차례나 비워내며 시간을 보내는 문화. 먼저 일어나겠다는 말을 꺼내기조차 조심스러운 그 '밀도 높은' 관계 속에서, 낯을 가리는 며느리인 나는 늘 경계 태세였다. 지금이야 "원래 그런 애"로 통하겠지만, 다정하게 다가서지 못하는 며느리를 향한 시부모님의 아쉬움은 여전할지도 모르겠다.
정답은 없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마음이 변했다.
상대의 온기에 물들어 서로 힘을 얻는 관계가 얼마나 귀한지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언젠가부터 친정 모임에서 나는 '가장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을 자처한다. 침묵을 깨기 위해 사소한 사건들을 꺼내놓고 부모님의 일상을 묻는다. 그것은 내게 일종의 '노력'이다. 나라도 조금 더 표현해서 이 정적인 공간에 다정한 온기를 전하고 싶다는 마음, 그 간절함이 나를 수다쟁이로 만든다.
말이 없다는 건, 내면의 풍경을 밖으로 꺼내는 근육이 아직 미숙하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끔 의구심이 든다. ‘말 한마디 꺼내기 어려워하는 내가 2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채울 수 있을까?’ 하는 당혹스러운 질문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쓰는 활동이 좋다. 머릿속 생각이 글자가 되어 눈 앞에 펼쳐지는 과정은 신비롭다. 나를 객관화해서 바라보게 하고, 닫혀있던 마음을 열어준다. 나의 소망은 어느덧 ‘작가’를 향해 있다. 말수는 적지만, 내면에는 화수분처럼 솟아나는 문장들이 가득하길 바라면서.
말 없는 사람이 쓴 글에는 그가 아껴둔 말만큼의 깊이가 담겨있지 않을까.
나는 오늘도 말을 아끼는 대신, 더 깊은 글을 쓰기로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