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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Feb 04. 2023

결국 사람

한겨울 가슴 속 품은 붕어빵처럼 따뜻한 인연, 여러분도 있으신가요?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내가 좋아하고 나와 죽이 척척 잘 맞는 사람보다 싫어하는(어쩌면 경멸까지도) 사람을 마주칠 확률이 훨씬 높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끔은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싶게
나와 죽이 잘 맞는 혹은 사회생활 내내 마음의 빚을 지게 되는 고마운 사람, 귀인을 만난다.

그런 귀인은 아무 때나 오지도 않지만 내가 그 귀인을 알아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와도 지나칠 확률이 크다.


한창 직장생활이 힘들었던 암흑기였다. 

내 지난 글들을 보면 알겠지만 나의 직장생활은 다소 순탄치 않았다. 3.5년 차를 지나고 있을 때쯤 어찌 보면 취업 시장에서 가장 귀하다던 대리급 시절, 어렵게 어렵게 들어간 대기업 호텔에선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홍보대행사에서 시작했던 내 커리어, 상처를 입고 1년 가까이 공백을 가진 뒤 외국계 소비재 대기업 계약직으로 들어간 뒤에 제대로 만난 세 번째 직장이었다. 


3.5년의 경력에 1년 공백, 두 번의 이직. 이 스펙이 어떻게 보면 내 힘들었던 사회생활을 반증하는 숫자였다.


사실 그전에 들어갔던 소비재 중소기업에서 맨날 밤 10시 이후에 퇴근하며 저녁도 못 챙겨 먹기 일쑤였고(6시에 회의를 하자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던 이사...) 내 얼굴은 빼짝 말라 해골이 된 뒤 한 달 반 만에 못 버티고 퇴사한 터라 이번만큼은 무조건 버텨야 했다. 버티지 않으면 더 이상 회사 생활 자체를 이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면접에 갈 때마다 공백에 대해 그리고 1년 남짓되는 첫 회사의 퇴사 이유에 대해 늘 찜찜한 곰팡이처럼 여기던 면접관들.. 하지만 이해는 한다. 찜찜할 수 있지, 하지만 나의 힘들었던 혹은 서글펐던 경험으로 나는 공백이나 짧은 이력에 대해 선입견이 가지려 하지 않는다. 적어도 한 번의 기회를 줘 보고 판단하려 하지..


야속하게도 그렇게 어렵게 잡은 기회였던 대기업 호텔에서의 내 생활은 정말 커리어 통틀어 대 위기였다. 

사실 럭셔리의 L도 모르는 나는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 인지도 없이 이력서를 넣었고, 덜컥 붙었지만 럭셔리에 크게 관심 없던 나는 뭐든 것이 새롭고 공부해야 할 것들 투성이었다. 


첩첩산중으로 내 사수는 나를 정말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원래 내 포지션에 있다가 업무 전환을 한 케이스였는데 사사건건 자신의 퍼포먼스는 훨씬 좋았다며 내 취향을, 일의 방식을 무시하기에 이르렀고 빨간펜 선생님처럼 모든 업무 심지어 이메일까지 자신의 리뷰를 거친 뒤 보내게 할 정도로 날 믿지 못했다. 심지어 입사 3개월 차에 날 불러다 놓고 본인이 이 일에 적성이 맞냐고 생각하냐며 다른 일을 알아보라고 할 정도... 내 업무 외에도 내 그루밍 스탠더드, 립스틱을 바르니 마느니 머리를 묶어라 잘라라 등 호텔의 얼굴이라고 생각하고 내 화장과 헤어, 옷 스타일까지 깊숙히 관여하며 나를 더 궁지에 몰았다.


기자미팅을 하면 하는 대로 결과를 꼭 갖고 와야 했고, 기자미팅을 안 나가면 안 잡는다고 타박을, 기자미팅을 나가면 언제 들어오냐고 눈치를 주었다.


결국, 사람

그러던 날들 중 하루, 메이저 일간지 국장과 점심 미팅을 했다. 그녀는 보기에도 이모뻘. 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그날도 어김없이 밥을 코로 먹는지 입으로 먹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떻게라도 호텔 홍보 기사를 실어보려고 기자의 관심사를 요리 저리 살피며 홍보하고 있었는데 역시 연륜은 남다른지 그녀는 나의 조급함을 단박에 알아본 것 같았다. 


자기가 내 사수를 아는데 힘들지 않냐며, 이전에 약속을 잡아두고 일언반구 없이 자신을 바람 맞혔다며 내 속을 꿰뚫듯 나를 다독였다. 밥을 먹은 뒤 내 손을 이끌고 근처 카페에 가서 케이크까지 한아름 사 온 그녀, 사회생활 선배로서 따뜻한 말들을 건넸다.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나왔다.


벼랑 끝에 내몰린 것 같은 내 조급함과 각박함이 보였을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날 처음 만나는 내 마음을 풀어주려고 그렇게 먼저 따뜻하게 다가온 사람은 사회생활 통틀어 처음이었다. 그날의 감사함은 그 따뜻함은 생각보다 오래 가슴에 남았다. 직장생활 10년 차인 지금에도 돌이켜 보면 마음 한편이 따스해지는 것이. 그리고 어른이란 이런 것이구나, 많이 배웠다. 나도 그녀처럼 추운 벼랑 끝에 몰린 후배를 보면 마음을 아끼지 말아야지 다짐하게 되었던 순간이었다.


그렇게 5년 뒤 나는 시니어 급으로 성장했고 1개월도 버티기 힘들 것 같았던 호텔에서의 직장생활을 무려 2년 반을 쌓은 뒤 이직했다. 더 이상 호텔 홍보를 하지 않으며 연락할 일도 줄게 되었는데 한 달 전 내 회사를 차리고 글로벌 호텔 브랜드 홍보를 맡아 오랜만에 보이는 이름에 반가운 마음에 인사할 겸 전화를 걸었다.


잘 되었다며 자기 일처럼 너무나 기뻐하는 그녀.


일로 만나도 이렇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도 업계 종사자로서 사람 대 사람으로 따뜻한 우정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하고, 이런 인연이 내게도 있다는 것이 한겨울 붕어빵을 품은 가슴처럼 따뜻해져 온다.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게 만드는 것도,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나게 하는 것도 

결국,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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