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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eetish Jun 27. 2018

잘 지내고 있나요?

기다려줌의 애정

잘 지내고 있나요?

최근 이런 연락을 자주 받는다. 한동안 교류가 없던 사람이 '툭'하고 메시지를 날렸다. 잘 지내느냐고. 왜 그 질문이 그리고 불편했을까? 답장을 하기가 극도로 귀찮아졌을 뿐만 아니라 이런 메시지를 보낸 상대방에게 짜증이 났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나를 귀찮게 하지?




그 사람의 극성맞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오지랖'이라고 부를 정도의 관심을 그는 이전에도 보인 일이 있었다. 딱히 나 한 사람을 아끼기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그런 관심을 모든 사람에게 두루두루 보였으니까. 아마도 그의 직책 때문이겠지. 사람들을 살피고 조직을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이 그의 주요 임무였다. 그의 그런 '극성맞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나는 그 사람에게 꽤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길에서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마주치면 나오지만, 절대로 지켜지지 않는 "언제 밥 한 번 먹자"라는 약속을 남발하는 사람들과 달리 그에게는 진심이 느껴졌다. 그의 관심이 그냥 '말' 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경계심이 많은 내가 어렵게 찾은 '기댈 수 있는 어른' 같았다.  그는 진심이라는 알맹이가 튼실한 관심을 타인에게 쏟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나에게 없는 자질이었다. 멀티 태스커가 못 되는 나는 한 번에 여러 사람에게 관심을 고루 줄 수 없는 사람이라 그 사람이 신기하기도, 대단하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주변 사람 정말 열심히 챙겼다. 모두가 그 사람의 열심을 고마워할 줄 알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 열심은 "내성적인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조직의 일에 더 열심히 참여하라며 자꾸 연락을 해댔다. "내성적인 사람"에 속한 나였지만, 그런 "극성맞음"에 나잇값 하며 지혜롭게 대처하고 싶었다. 본성은 "피해 다녀라"라고 말했지만 문제를 피하는 것은 옳은 해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그에 걸맞게 행동해야 할 정도의 나이였다. 




신변의 변화가 있거나 문제가 있을 때, 내가 먼저 그에게 알렸다. '이러저러한 사정이 생겼습니다. 당분간 조직의 일에 참여를 잘 못할 수도 있습니다.' 별것 아닌 말의 위력은 대단했다. 그는 부담스럽게 연락을 해오지도 않았고 우연히 마주칠 때도 내가 이것저것 캐물으며 추궁하지 않았다. 나의 앞으로의 일정과 계획을 묻던 그 사람에게 나는 "확정이 되면 먼저 알려드리겠다"라고. 그리고 확정되기 전까지 다른 사람들은 몰랐으면 좋겠으니 그때까지 함구해주셨으면 좋겠노라고. "지켜지지 않을 약속"을 하는 것도 듣는 것도 싫어하는 나는 그 말을 할 때 정말 그렇게 행동하겠단 의지가 있었다. 확정이 되면 꼭 말하리라. 



내 말을 믿지 못했던 걸까? 그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지 않은 근황을, 내가 공유하고 싶지 않은 때에, 내가 공유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 알렸다. 나의 비밀 아닌 비밀이 폭로되던 순간, 그 무리 중에는 그것에 대해 이미 알고 있던 친구도 섞여 있었다. 그 친구가 비밀을 알고 있던 이유는 내가 기꺼이 먼저 알렸기 때문이었다. 그 친구는 잔혹한 폭로의 현장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제가 그 친구를 잘 아는데 이거 이렇게 얘기하는 거 그 친구가 알면 정말 싫어할 거 같은데요."  

그리고 그 친구는 그 모임 이후 나에게 그때의 상황에 대해 전해주었다. 화가 났다. 그리고 창피했다. 내가 아직 알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일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알아버렸다. 그것도 내가 특별히 "먼저 알리고 이해를 구했던 사람"에 의해. 장문의 메시지를 그에게 보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해 깊은 유감이 담긴 아주 긴 메시지를. 그가 한 일이 나를 아주 슬프게 했지만, 난 그의 선의를 믿었다. 그것을 의심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의 선의와 애정이 발현되는 방식이 나와는 아주 달랐던 것일 뿐. 그의 애정은 "드러냄"으로 표현되는  반면, 나의 애정은 "기다려줌"으로 발현되었다. 나는 그가 나의 시간을 기다려주기를 바랐지만 그는 내가 드러내 주기를 바랐다. 내가 보낸 메시지를 읽고 그는 매우 당황한 듯했고 즉각적으로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진심 어린 사과와 함께 말이다. 진심 하나만큼은 끝내주는 사람이다. 그 후로 딱 한번 그를 만난 적 있다. 그 사람은 오래 망설이다 내게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나의 의지와는 달리 일의 진행 상황이 부진하여 미처 알리지 못했음과 그래서 그 상황에서 나의 일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던 때의 내가 느낀 당혹감과 수치심을 그에게 설명했다. 그는 내가 익히 이해하고 있는 "자신의 선의"에 대해 설명했다. 우리는 같이 식사를 했고 차를 마셨으며 그날의 만남을 좋게 마무리했다. 

헤어질 때, 나는 그에게 약속했다. "알릴 수 있을 때 알려드릴게요"라고.
그 후로 몇 주가 지났고, 나의 일의 진행 상황은 아직도 더디다. 말할 수 있는 것도, 말할 만한 것도 없다.
지지부진한 진행 상황에 누구보다 내가 가장 지쳐 있는 상태이다. 
오늘 그로부터 또 연락이 왔다. 부끄럽지만 그의 메시지에 대답하지 않았다. 
잘 지내고 있냐는 그 말을 기쁘게 받을 수 없는 이유는 내가 스스로에게 떳떳할 정도로 잘 지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럴 때마다, 나 스스로가 돌연변이쯤으로 느껴진다. 

관심과 선의를 불편해하는 나 자신이, 약하고 아픈 부분을 타인에게 밝히지 못하는 내 성격이.
잘 지내고 있냐는 질문에 불편함을 느낀다는 것은 역시 이상한 걸까? 
나는 비정상적인 것일까?
그의 말대로 나는 고침을 받아야 하는 대상인 걸까?




그는 오늘 선의를 가지고 나에게 물었다. 


"잘 지내고 있어요?"

아니요. 저는 요즘 이런 생각으로 그다지 잘 지내고 있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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