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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lly Yoon Jan 24. 2022

단정하지 말자. 인생은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모른다.

이방인의 주저리



열여섯이었다. 
일본 문화를 처음 접한 것은.


만화를 좋아했고, J-Pop을 좋아했고, 일본 드라마를 좋아했다. 번역이 되어 올라오는 신간을 기다릴 수 없어 시작한 일본어 공부. 제2외국어 선택은 당연히 일본어. 학교 시험은 말아먹어도 일본어 시험만큼은 만점을 받을 정도로 일본어를, 일본이라는 나라를 사랑했다. 집안 형편상 일본 유학은 엄두도 못 냈고, 전문대를 졸업하자마자 일본으로 떠났다.


그렇게 큰 배낭을 어깨에 짊어지고, 커다란 캐리어 1개를 끌고 떠난 일본 워킹홀리데이. 

내가 동경해 마지않던 나라에서 기쁘기만 할 줄 알았던 나는 처음으로 겪는 타국살이에 호된 시련을 겪어야 했다. 책으로 배운 일본어와 현실의 일본어의 갭은 너무나 컸으며, 한인사회는 좁고 텃세가 심했다. 나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받아야 하는 차별에 늘 서러움을 끌어안은 채 일본 생활을 버텼다. 


나를 면전에 두고 자기들끼리 성적인 농담을 주고받는 것을 일본어를 못한다는 핑계를 삼아 귀를 막고 못 알아듣는 척했다. 그 당시 나는 어렸고, 일본인들 사이에 섞이지 못하고 겉돌며 주눅이 들어 있었다. 


드라마 속에서 보아왔던 일본인의 따듯하고 친절함 대신 차별과 냉소적인 태도에서 나는 그들에게 마음의 문을 닫기 시작했다. 물론 돌아보면 내게 손을 내밀어준 많은 일본인들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내 어린 마음은 또다시 상처받을까 두려워 그들의 친절함을 색안경을 끼고 보기 시작했다. 그러하다 보니 내가 꿈꿔왔던 일본 생활은 점점 바닥으로 치닫게 되었고, 주변엔 일본인보다 한국인 친구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일본 생활에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일본에서의 미래를 꿈꾸며 왔건만 1년이 지나도 내 일본어는 미숙했고, 나 역시 어느새 그 좁은 한인사회의 일원이 되어 한국 사장님의 비위를 맞춰가며 부당한 임금과 노동시간을 바치며 생활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살면 받지 않아도 되는 차별, 어려움,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일본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음식을 주문할 때도, 가게에서 물건을 구입할 때도, 교통수단을 이용할 때도, 집 안에 있는 시간을 빼곤 단 한 번도 마음이 편했던 적이 없었다. 내가 일본에 온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며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지금 당장 한국에 돌아갈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고작 그딴 걸로 한국에 돌아온 거야?라고 잔소리할 가족들과 친구들의 눈치가 보여 계획한 기간은 채우고 돌아가자, 라는 오기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1년 반 남짓한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땐 미운 정도 정이라고 일본에 다시 올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한국에서도 일본 회사에 이력서를 넣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일단 한국행을 결정하긴 했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이 지옥 같던 일본 생활을 청산한다는 기쁨에 울부짖고 싶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흘렀다. 

누군가에게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인생의 터닝 포인트일 수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인연을 찾았을 수도, 혹은 새로운 가치 있는 일을 찾았을 수도 있다. 나는 남들과 똑같이 주어진 시간과 환경에서 불평과 불만만 늘어놓으며 시간을 보냈다. 일본에선 '어차피 한국에 돌아갈 건데 뭐' 안일한 생각으로 내 인생을 무책임하게 보냈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일본어가 능숙해진 것도, 특별한 경험을 한 것도 없군' 시간을 낭비했다는 불안함에 자격지심만 커졌다. 


한국에 돌아와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취업난이 아닌 주변 사람들의 말과 시선이었다. 


"일본에 뼈를 묻을 것처럼 떠나더니 한국에서 살려고?"

"이제 일본어 잘하겠네? 일본어 강사 하면 되겠다."


내게 일본과 관련된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에게 구구절절 내 불쌍한 일본 생활을 읊어야 했다. '나 그곳에서 그렇게 힘들게 살았어요. 집세 내느냐 공부할 시간도 없이 불법 임금을 받으며 알바 3개를 뛰며 살아남아야 했어요. 온갖 차별을 받으면서도 기댈 곳 하나 없이 혼자 버텼어요.' 나는 그렇게 일본이라는 나라를 탓하며 내 처지를 합리화시키려고 했다. 나는 그렇게 내가 평생 살 줄 알았던 나라를 잃어버렸다. 내가 동경해 마지않던 일본이라는 나라의 환상에서 깨어난 것이다. 더 이상 일본 드라마는 내 관심사가 아니었고, 일본 음악이 마음에 와닿지 않았으며, 아름다운 언어라 생각했던 일본어는 들여다볼 일이 없게 되었다. 


열여섯부터 시작된 일본 앓이는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종지부를 찍었다. 

이제 내 인생은 한국에서 이끌어나가야 한다는 것이 명확해지는 시점이기도 했다. 


내게 일본이란 나라는 여전히 아픈 손가락이다. 

내 젊은 시절을 다 쏟아부었던 나라. 많이 사랑한 만큼 많이 아팠던 나라. 

그리고 더 이상 내 나라가 아닌 나라. 


인생의 여러 굴곡을 지난 지금, 어느새 서른 중반을 넘어가고 있다. 

일본을 떠난 후로 정말 많은 나라를 돌아다녔다. 일본처럼 열정을 가지고 사랑한 나라는 없었지만 호주에서 좋은 인연을 만나 잠시나마 정착해서 살아보기도 했다. 가족들은 먼길 돌아 호주에 정착한다고 믿었고, 나 역시 내가 호주에서 살게 될 운명이라 믿었다. 


지금은 한국도 일본도 호주도 아닌 캐나다에 살고 있다. 이곳이 현재 나의 새로운 나라. 캐나다에서의 삶은 일본과 똑같다. 나는 여전히 불편함과 차별을 받으며 살아간다. 바뀐 점이 있다면 더 이상 '어차피 한국에 돌아갈 건데 뭐'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겨울이 오면 일본이 생각이 난다. 

내가 처음으로 일본 땅을 밟았던 그 계절. 이젠 일본이 아닌 캐나다에서 차가운 겨울바람을 코로 들이키며 내가 지나왔던 나라들을 떠올린다. 장담했던 내 일본에서의 삶들이 꿈같은 기억으로 남았고, 운명일 줄 알았던 호주의 삶 역시 기억의 한편으로 남았기에 캐나다에서의 삶도 두렵다. 


캐나다의 삶도 꿈이 되어버릴까 봐. 깨고 나면 아무도 알지 못하는 내 기억 속에만 잔재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봐. 그래서 나는 내가 캐나다에 뿌리내리고 살거라 장담하고 싶지 않다. 인생은 나를 어느 곳으로 데려갈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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