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연애의 단상
"Do you wanna have a lunch at sunnybank?"
"Yes"
"What do you like? sushi or ramen?"
"Yes"
나는 어쩌다 영어권 외국인을 만나 "YES"만 냅다 외치는 여자가 되었을까? 처음 외국인을 만나 데이트할 때 내 영어는 중학단어만 아는 수준이었다. 간단한 문장 구사에도 버퍼링 걸리기 부지기수.
나를 '예스녀'로 만들어 준 남자의 이름은 제이였다.
다행히 제이는 말이 많은 남자였다.
내가 말이 없어도 그는 혼자 떠들고 대답까지 하는 정말 말이 많은 남자였다. 당시 나는 제이가 영어에 미숙한 나를 이해해 주는 배려 깊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지금 와서 적어보자면 배려는 무슨.
그는 그냥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훗날 말했다.
내가 영어를 못한다는 생각보다 천성이 얌전하고 조용한 타입이라 말 수가 적은 줄 알았다고.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지만 이야기를 하려면 문장을 만들어야 했고, 적절한 단어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정말 급할 때는 단어 하나하나 구글 번역기에 돌려야 했다.
나는 예스녀로서 수많은 그의 말에 토 달지 않고 예스라 대답했다. 대화랄 것도 없는 우리의 관계는 이상하게 점점 깊어졌다.
제이는 매번 예스만 외치는 나를 굉장히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더랬다.
영어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한번쯤 봤다는 그래머 인 유즈를 펼쳤다. 언어는 백지상태에서 시작해야 스펀지처럼 흡수한다는 말은 일리가 있었다.
23살까지 일본어 전공자였던 내가 27이 되어서야 본격적인 영어의 문법을 배웠고, 문법을 알자 드디어 내 입에서 문장이 만들어졌다.
제이는 내가 문장을 만들어 말할 때마다 오오- 하고 작은 환호성을 자아냈다.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공부에 의지를 불태운 자세에 감탄했다고 했다.
내 영어 수준을 알고 있던 지인은 꽤나 놀란 눈치였다. 영어라고는 이제 겨우 현재시제와 과거시제의 차이를 배우기 시작한 내가 외국인을 만난다는 것이 신기한 기색이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연애를 하고 있지만 이게 연애인가 의구심을 품은 적인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내 연애는 예스만 하다 끝나버릴지도.
"We better stop seeing eachother.. "
"Yes"
이별의 순간조차 나는 예스로 관계를 끝내고 말겠지.
나는 제이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기로 했다.
그의 대답은 너무 명쾌했다.
"Because you are such a good listener" (왜냐면 너는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잖아)
"oh..I see"
개상노무자식.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래머인유즈를 폈다.
굿 리스너 같은 소리 하네. 나는 성인이 된 이후 처음으로 학구열에 불타 올랐다.
의견충돌이 있었다. 이 의견충돌 역시 언어장벽으로 인한 오해였다. 누구의 탓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우리 둘 다 화가 극도로 오른 상태였다.
제이는 고성을 지르며 빠른 영어로 쏘아댔고, 나는 그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You... you.. you... you.."
머릿속이 백지장이 되어 바보처럼 말을 더듬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 집을 뛰쳐나왔다. 길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어쩌다 일이 그렇게 되었는지 그에게 설명하고 싶었다. 잘못된 표현 방식에 생긴 오해였고. 이게 그렇게까지 화낼 일인가 그에게 묻고 싶었다.
영어가 내 모국어가 아니라는 걸 뻔히 알면서, 한 번쯤 이해해 줄 수 있는 것 아니야? 이 모든 것을 영어로 얘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온 단어가 고작 “You” 였다니.
억울하고, 서운하고, 열받는 내 심정을 표현할 수 있는말이 고작 you you you 라니!!
나 참 쪽팔려서.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같은 한국인과 연애해도 대화가 될까 말까 한 판에 외국인과의 연애. 대화마저 원활하지 않은 관계는 결국 파국을 맞이하는 것이 옳았다.
수 차례 화가 나는 상황에서 참았고, 수 차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목뒤로 삼키었다. 수 차례 반박하고 싶었지만 머릿속이 하얘졌고, 나는 내 안에 답답한 응어리를 끌어 안은채 연애를 이어나가야 했다.
어느 날이었다.
시답지 않은 이유로 우리는 또 싸웠고 그날 나는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개가 되었다.
소리치고, 물건을 던지고, 깨부수며 한 마리의 미친 짐승처럼 화를 분출했더랬다. 가히 인간답지 못한 행동이었음에, 그 순간을 떠올리면 나는 여전히 수치스럽다. 그리고 언어가 인간을 얼마나 인간답게 만드는지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보고 삿대질을 했다. 한국말로 중첩되었던 울분을 터트렸다. 그는 갑자기 듣게 된 한국어에 어리둥절해하다 못내 웃음을 터트렸다.
"웃어? 이 씨발새끼가 지금 웃음이 나와?"
당연히 못 알아들을걸 알기에, 시원하게 욕이란 욕은 다 퍼부어보았다. 내 입에 온갖 상스러운 욕이 올라왔고, 살면서 이런 욕은 입에 담아본 적도 없기에 이 상황이 전부 코미디 같았다.
나는 "좆 까지 마!"를 끝으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배를 잡고 주저앉았다.
바닥엔 그릇과 화병이 전부 깨져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우리 두 사람은 전쟁터나 다름없는 거실을 두리번거리다 기가 막혀 다시 낄낄 거렸다.
"I dont know what you saying to me, but I sure you sware to me a lot.. that's freacking cute"
(네가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욕이라면…존나 귀엽다.)
그 말을 듣는데 나는 다시 꼭지가 돌뻔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제이를 보며 말했다.
"I am not going to speak in english with you! if you wanna talk to me, you speak in krorea!”
(앞으로 영어로 말 안 할 거야! 나랑 말하고 싶으면 네가 한국말해!)
다음날까지도 그는 내가 열받아 그냥 한 소리인 줄 알았더란다.
내가 모든 그의 질문에 한국말로 답하자 그제야 그는 이거 진짜구나 절감했다고 한다.
그는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을 다운받았다. 매일 아침 공부했고,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그날 배웠던 한국어를 중얼거리며 내게 테스트해보기 시작했다.
달려요, 마셔요, 걸어요, 만 말하던 실력이 일주일이 지나자 강아지가 달려요, 사람이 걸어요, 물을 마셔요, 까지 발전되었다. 의외로 꾸준히 공부하는 모습이 기특했다. 나는 제이의 이런 모습을 사랑했다.
제이는 늘 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제 스스로 로맨티스트라 자칭하는 남자는 귀엽다. 지금에 와 돌이켜보니 제이의 말은 맞았다.
사랑은 언어와 대화를 떠나 서로에 대한 이해와 포용에 있다 생각한다.
국제연애를 하다 보면 말로 표현하고 싶은 한계, 문화 이해의 한계에 부딪히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애틋한 사랑은 연애의 한 부산물이 되어 버리고, 우리는 매 순간 언어와 문화 차이에 타협을 보고 싸우느냐 사랑의 본질을 잊어버린다.
문화의 차이. 상대방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싶어도 이해되지 않는 것들. 공감할 수 없는 것들. 나는 국제연애를 하는 동안 온갖 부수적인 것들과 싸워야 했다.
저 바보 같은 로맨티스트를 사랑하기 위해 그래야 했고, 그게 당연하다 생각하니 나의 연애는 편해졌다.
이건 참 환장할 일 투성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