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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lly Yoon May 06. 2021

속옷이 가지는 딜레마.



미니멀리즘은 선호하는 내 삶에 쇼핑은 흔치 않은 일이다. 날씨가 풀린 탓도 있을 것이고 왠지 오랜만에 이쁜 청바지 하나가 갖고 싶어 졌다. 청바지와 옷 몇 벌을 구입하고 근처 쇼핑몰을 둘러보다 속옷가게 앞에서 발이 멈췄다. 몇 달 전 구입한 속옷은 실용성을 강조한 제품이라 밋밋한 디자인이었다. 



속옷을 야하다고 표현할 수 없겠지만 야한 분위기를 이끌어 내는 속옷 하나쯤 가지고 싶은 것이 여자의 욕심이고, 실제로 그런 속옷 한벌 없는 여자가 있을까 싶다. 마네킹에 디스플레이 해 둔 디자인을 요리조리 꼼꼼히 살펴보았다. 



요즘은 참 다양한 디자인에 퀄리티 높은 재질의 속옷이 많다. 피팅룸에서 종류별로 집어 든 속옷을 입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여자구나 싶었다. 내 속옷이 이쁘다던 그의 말에 수줍게 웃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더 예쁜 속옷을 입고 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다. 그래서 내 발걸음은 속옷가게 앞에서 멈췄던 것일까? 



3년을 사귄 남자 친구가 있었다. 당시 장거리 연애를 하고 있던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오직 주말뿐이었다. 주말이 되면 나는 어떤 속옷을 입고 나갈지 걱정했다. 2년이 되자 우리는 서로의 습관을 낱낱이 알게 돼 듯 속옷이 몇 벌인 지 어떤 속옷을 즐겨 입는지까지 알게 되었다. 3년으로 접어들었을 때쯤 내 속옷 구매의 우선순위는 실용성이 되었다. 


여전히 계절별로 유행에 맞춘, 새로운 의상을 구매했지만 더 이상 속옷은 예쁘고 새로울 필요가 없었다. 그때쯤 우리에겐 권태가 왔다. 누군가 그랬다. 머리를 어떻게 바꾸는지 고민하는 것처럼 속옷을 바꾸는 고민을 해야 한다고. 그것은 연애감정을 더욱 긍정적으로 바라보 게 만드는 것뿐 아니라 여자로서의 자신감을 지키는 일이라고 했다. 


권태기가 왔을 때 내가 남자 친구를 위한 새로운 속옷을 고르며 다시 한번 여자로서 사랑받았다면 우리의 관계는 조금 더 유지될 수 있었을까?




여자에게 속옷이라는 것은 보여줄 수 없지만 보여주고 싶음이다. 그것이 특별한 누군가를 위함이든, 새로운 상대를 위함이든, 속옷에 신경 쓴다는 것은 여자로서 남자에게 다가가고 싶은, 그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욕구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통계자료를 통해 발견된 사실은 대다수의 남자들이 여자가 어떤 속옷을 입고 있는지 잘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주제를 가지고 술자리에서 남자들에게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진짜야? 여자가 어떤 속옷을 입었는지 기억 못 해?"

"보통은 그렇지. 너는 그럼 남자가 무슨 팬티 입었는지 기억해?"

"아!"


그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수많은 미디어에서 보여지는 섹시하고 농염한 여자는 늘 화려한 속옷과 함께였다. 그것은 매번 큰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보여졌으며 이 한 장면이 얼마나 우리의 뇌를 세뇌시켰는지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현실세계에서 우리가 상대의 속옷을 보는 순간은 옷을 벗기는 순간이 아닌, 옷을 입는 순간이라는 것을! 다음 날 아침, 샤워를 마치고 고심해서 선택한 속옷을 입고 상대방 앞에 섰을 때. 밤은 끝났지만 여전히 여성의 몸을 부곽 시키는 속옷을 입고 농밀함을 드러낼 때. 그 순간이야 말로 속옷이 조명을 받는 순간이 된다. 그리고 상대에게 '그렇지, 내가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와 하룻밤을 보냈지.'라고 생각하게 만들고 싶은 목적 달성까지. 




속옷이 가진 딜레마는 어쩐지 삶이 가진 모순과도 닮아 있었다. 나를 위해 입지만 상대의 시선을 고려해서 구매해야 한다. 벗을 때 보여지는 것이 아닌 입을 때 보여진다는 아이러니.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의 모습을 봐달라고 울부짖는 우리네 삶의 모순. 


화려하기는 한데 이곳의 브랜드는 내 취향이 아니라 속옷을 벗고 매장을 빠져나왔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인파 사이에서 불현 생각이 들었다. 


오늘 이 사람들은 어떤 속옷을 입고 나왔을까. 

평소 즐겨 입는 속옷? 혹은 누군가를 위한 속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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