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긋남

by 이상찬

30년의 인생이 텅 비어있다는 상실감에 빠져든다. 어엿한 어른이 되어 한껏 무르익은 사람이 되어야하건만 오히려 역행된 존재로 자리 잡아버린 느낌이다. 어디서부터 어긋나 버린걸까. 사실 어릴 때부터 줄곧 해온 공부는 독약과도 같았다. 처음에는 독소의 양이 너무 미미해서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농축된 독에 중독되어 버렸고 끝끝내 몸과 마음은 그것에 완전히 사로잡혀 잠식되어 버렸다. 어른들이 말하는 소위 공부란 취업의 수단과 도구가 되도록 철저히 훈련하는 행위에 불과했다. 배움의 목적지는 이력서에 적어나갈 대학명, 학점, 자격증과 몇몇의 맥없는 경험들을 향하고 있었다. 똑똑한 사람이 되라는 것은 그런 의미였었다.

그렇게 인생의 자유는 줄줄이 구속되어 갔지만 신기하게도 틀에 갇히면 갇힐수록 오히려 안정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훌륭히 모방했고 조금 특이한 부분을 개성이라 칭하며 내가 보는 이 모든 것들이 세상의 전부라 생각하며 지냈다. 누구나 알 법한 번듯한 대학에 나오고 누구나 간절히 원하던 대기업에도 손쉽게 입사하면서 어느 부분에선 성취감도 이뤄냈다. 자본주의 사회의 지극히 일반적이고 생산적인 노동자로서 거듭났다는 점에서는 교육의 목표는 달성한 셈이다. 회사에 충성을 맹세하고 퇴근 후 찾아오는 공백은 동기와의 한탄 젖은 술자리로 메꾸며 가끔은 숨 막히는 회식으로도 대체한다. 틈틈이 주식과 부동산에도 발 담궈 나가며 흐릿한 미래의 안정된 삶을 위한 준비를 해나간다. 그리고 이 기막힌 주기의 반복성은 끊임없이 이어지며 당연한 일상으로 단단히 못 박혀버린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 내일과 같은 어제로 원복. 마침내 흐릿해졌던 미래가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정해진 선로를 타고 내달리는 기차에 탑승하는 기분이었다. 원하던, 원하지 않았던... 그렇지만 마땅히 느껴야 할 익숙함은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내적 성숙에 정지를 선언해 오다 보니 어느 날 갑작스레, 깊숙이 배회하던 공허함과 허탈감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마침내는 그 차가운 수증기들은 마음을 장악해버렸고 고통에 몸부림치게 했다. 무언가라도 잡기 위해 허공에 손을 그렇게도 아등바등 저어댔는데 공기 빠지듯 손틈 사이로 모두 새어나가 버리고 결국엔 텅 빈 두 손을 마주하게 되는 그런 상황에 처한 느낌이었다.

무릇 다른 입장에서 본다면 나름 성공한 인생이고 앞으로의 펼쳐진 미래를 따라가라고 외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건 내 삶이 아니다. 인생의 주인공으로서 당당하게 살아 숨 쉬는 모습이 아니다. 이것은 주변의 시선들과 사회에서 빚어낸 기괴한 인간형상의 찰흙 덩어리에 불과하다. 나에겐 그럴듯하게 짜여진 각본의 순리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과감하게 퇴사를 선택했다. 다들 이 시기에 나가는 것은 미친 짓이고 나중에는 후회와 비참함으로 몸부림치게 될거라 입방아를 찧어댔다. 순간적인 감정에서 나오는 충동적인 행위이며 세상 물정 모르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어린 아이의 상상력이라 떠들어댔다.

하지만 내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은 저 야성미 가득한 거친 세상이다. 잡초와 같은 기질이 내 몸 속에 떠돌아다니고 있다. 귀여움 받고 안락함이 만연한 온실 속이 아닌, 거친 추위와 강렬한 더위, 절규와 황홀, 슬픔과 기쁨, 진실과 거짓 등이 한데 뒤섞인 그 곳이야말로 온전한 잡초로서의 삶의 터전이다.

자유를 만끽하는 첫 해방감.

지금 내가 행하는 것들은 나를 향한 최초의 눈길이며 세상에 대한 최초의 저항이다. 물론 뒤에 잇따르는 감정들이 압도적으로 지배적이다. 칠흑 같은 암흑이 드리운 숲 속에서 먹잇감을 노리는 굶주린 맹수처럼 두려움, 불안, 허탈, 공허, 고독, 무기력의 기운들이 언제든지 사방에 여전히 도사리고 있다. 포기해야만 했던 많은 것들에 애써 등을 돌리고 앞으로 도전해야 하는 험난한 여정들을 보다 보면 여전히 마음이 무겁게 짓누른다. 천성적으로 여리고 나약한 성격도 그런 강렬한 화염의 소용돌이에 기름을 도리어 끼얹는다. 어렴풋한 미래를 마주하기만 해도 기가 팍 죽어버리고 몸서리가 쳐지지만 작은 잰걸음으로라도 조금씩, 용기내어 내딛어 보련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내가 택한 것들이고 마음껏 받아들여야한다.

그리고 그 과감한 결정들에 대해선 결과가 어떻든

‘후회하지 않는다.’

그 한마디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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