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소리
대학교 시절 땐 학생 신분답게 늘 돈에 시달렸다. 육체적 노동이 결부되어있는 단기적인 아르바이트를 틈틈이 해왔지만, 돈은 턱없이 부족했다. 한정된 자본 내에서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렇다고 해서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긴 싫었다.
우연히 대학 동기로부터 여름 방학 동안 진행되는 삼성 드림클래스를 지원해보라는 말을 들었다. 교육 환경이 열악한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수업을 3주에 걸쳐 진행하고 그에 겸해 상당히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나는 그 무엇보다 ‘상당히 많다’라는 말에 의식이 사로잡혔다. 머릿속에는 그 금액과 치환될 수 있는 것들을 부지런히 상상해 댔다. 나중에는 역시나, 여기에 지원하겠다는 쪽으로 결론이 내려졌고 바로 실행에 들어갔다. 자기소개서에는 최대한 좋은 면들로만 장식해 나갔다. 꽤 괜찮은 학점과 수능 성적, 고등학교 2년간의 봉사 활동, ‘교육’과 ‘봉사’에 대해 열정을 토로하는 말들로 쉬이 채워나갔다. 누가 보더라도 경쟁력을 갖출만한 매력적인 것들이었다. 제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서류 전형 합격’이라는 이미 예견했던 시시한 결과를 받았다. 그러곤 바로 다음 단계인 면접 준비에 착수했다. 예상 질문지들을 뽑아 성실하게 답변을 적어나갔고, 당황할 때를 대비해 핵심 키워드도 질문과 연관하여 완벽하게 암기했다.
면접 당일,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은 상태로 다른 면접자들과 함께 대기실에서 앉아 있었다. 다들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기에 서로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남자 누군가의 첫마디를 계기로 얼음장 같던 분위기는 눈 녹듯 사라지고 금세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재잘거리는 수다 덕분인지 사람들의 몸을 지배하던 긴장감도 어느 정도는 해소할 수 있었다.
주고받은 말들은 대략 이런 것들이었다.
‘삼성 드림클래스에 붙으면 250만원에 달하는 돈을 받을 수 있어서 다른 아르바이트에 비하면 가성비가 제법 좋은 편이다.’
‘나중에 취업할 때 이력서에도 한 줄을 추가할 수 있다.’
‘눈 맞아서 커플이 되는 경우도 많다.’ 등등...
사람 사이의 주된 주제인 돈, 연애, 취업 등과 같은 소재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그런데 여기서 신기한 점은 사람들 대다수가 면접장에 들어갔을 때 앞선 소재들은 모두 그릇된 것들이었다는 전제로 말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봉사’나 ‘교육’에 대한 참된 의미를 힘주어 얘기하며 그것들이 전적으로 자신들의 진실된 마음이라고 외쳐댔다. 면접장으로 들어가는 문을 경계로도 사람이 180도 변해버리는 것을 보면서 저 얇은 문에는 깨달음을 주는 마법이 걸려있나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다시 내 주특기인 멍 때리며 사색에 들어가는 시간이 돌아온 것이다.
‘나는 여기에 왜 앉아 있는 걸까? 역시 돈이 필요해서겠지... 봉사나 교육의 진정한 의미 따위는 잊고 돈만 생각하자. 가식이 넘쳐나는 세상이니 나도 그 흐름에 따라 행동하고 생각해야지. 취직에 도움도 되고, 돈도 벌고, 안주 삼아 이번 경험을 떠들어댈 수 있고, 봉사를 좀 해본 것처럼 우쭐댈 수도 있으니까.’
고루한 생각들은 던져버리고 융통성이라는 것에 편들어 주며 자기 최면을 단단히 걸어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이름이 호명되었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면접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앞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조그마한 의자가 놓여있었다. 최종 목적지가 바로 저기였다. 문에서 의자까지는 몇 걸음이면 닿는 짧은 거리였지만 왜 이리 멀게만 느껴지는 걸까. 마지막 발걸음을 옮기고 나서 자리에 앉는 순간, 깊숙이 숨겨져 있던 어떤 추억과 함께 최면의 자물쇠는 허무하게도 힘없이 풀려버렸다.
첫 이미지는 행복한 친구의 미소였다.
주말마다 학교에 가서 무료 교육을 하던 친구.
시간과 노력을 굳이 써가며 봉사를 해오던 친구의 한없는 자기희생.
그러곤 그와 관련된 추억들을 나에게 이야기해주는 친구의 행복해하던 표정.
생각의 마지막 이미지는 거기까지였다.
나는 미소지었다.
면접관 앞에서 늘 짓는 교태 어린 미소가 아닌,
친구가 내게 보여주었던 미소의 의미를 깨닫고 나오는 자연스러운 미소.
그 친구의 모습을 떠올린 이상, 이 면접은 의미가 없었다. 나는 그저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자리를 박차서 나가고 싶었지만, 이왕 들어온 거 면접은 보기로 했다. 면접관들에게 최악으로 보이고 싶어 최선을 다해 연기했다. 결과는 다행스럽게도 최종 면접 탈락. 통쾌하면서도 서글펐다. 뭐 그럭저럭 괜찮다.
세상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는 나에겐 익숙하고도 뻔한 결말이니까.
그리곤 다시 가난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비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