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퀴벌레와의 조우

바퀴벌레 같은 추억 또는 추억 같은 바퀴벌레

by 이상찬

아늑하고도 고요한 자취방에 늘 상주하고 있는 친구가 있습니다.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영감이 되어주는 여자 친구일거라 상상하실 수도 있겠지만은,

아쉽게도 그 주인공은 은밀한 좀도둑 같은 바퀴벌레입니다.

말은 친구라고 표현했지만 거기에 수식어를 덧붙여줘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원수 같은’이 가장 적당한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 원수 같은 친구 녀석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야겠습니다.


하루의 일정이 빡빡하거나 타고난 게으름 때문에 설거지를 미루거나 음식물을 제때 치우지 않는 날이면 그 소식은 빛보다 빠른 입소문으로 오르내려 원수 같은 친구들을 소집해 우루루 데려오곤 했습니다.

가뜩이나 빌라 1층에는 스시집을 운영하고 있어 살이 오를대로 오른 녀석들이었습니다.

사람을 마주해온 풍부한 경험과 이론도 겸비하고 있어 사람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이동 경로는 그들 손바닥 안이었고 휘두르는 파리채까지 피할 수 있는 몸놀림 또한 갖추고 있었습니다.

발을 굴려대는 속도도 얼마나 빠르던지 파리채를 강하게 내려치는 위치도 항상 그 녀석들이 지나간 잔상이었습니다.


이대로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저 또한 표유류의 최상위 종으로서 거드름을 피우는 이 건방진 녀석들을 굴복시키고 싶었습니다.

인터넷상에 떠도는 수많은 노하우와 지혜를 곱씹어 철저한 계획을 짜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약국에서 필요 이상의 맥스포겔을 구입한 뒤 예상가능한 이동 경로에 넘칠만큼 발라대고

얄팍한 플라스틱으로 구성된 파리채도 1.5V 건전지 4개가 들어가야하는 아주 든든한 전기 파리채로 한 단계 격상시켰습니다.


‘너희들의 그 거만한 위상을 오늘부터 사정없이 짓밟아주마!’


전기 파리채를 가슴에 품고서 이부자리에 파고들어 숙연하고도 경건한 자세로 기다렸습니다.

아무리 날고 기는 녀석들이라도 감히 인간을 업신여긴다는 것은 저로서도 자존심이 상합니다.

처절한 응징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교육이라 생각하며 기대감으로 마음을 한껏 부풀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그 뒤로 몇 달동안 그 그리운 친구들의 더듬이 털조차 보지 못했습니다.

기뻐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지만 섭섭함이 더 크게 느껴지는건 왜일까요?

왜 저는 그 시덥잖은 일들로 분노에 치를 떨어야했을까요?
‘에잇!’하고 소리치며 애꿎은 전기 파리채에게 화풀이만 해대고

쓸데없는 돈과 시간만 날렸다는 생각에 그 존재들이 더 얄밉기만 합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이 녀석들은 귀여운 수준에 그친다고 말해줄 수 있습니다.

이전에 봤던 그 녀석들에 비하면 말입니다.


상당히 어린 시절 수학 학원을 다닐 때인걸로 기억합니다.

그 건물은 상당히 노후화 되었는데 화장실이 특히 심했습니다.

소변기 안의 노란 암모니아가 기다란 바코드 띠처럼 줄무늬를 이루고 있고,

타일마다 자리 잡고 있는 칙칙한 검은 곰팡이이며,

구석구석 아름답게 수놓은 거미집들이 세월의 흔적을 드러내주는 요소들이었습니다.


그 날이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빈대떡보다 더 동그란 보름달이 떠있던 걸로 기억합니다.

오랜시간 참아 한껏 부풀어오른 방광을 쥐어짜내기 위해 다급하게 화장실에 들어갔습니다.

노르스름한 달빛과 누런 전구의 불빛이 아담한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코를 찌르는 듯한 오줌 지린내를 맡으며 바지를 내렸고 막 오줌을 발사하려는 찰나,

매끈한 재질에 반사된 흐릿한 빛줄기가 제 눈으로 얼핏 들어왔습니다.

순간적인 자극에 이끌려 눈길을 돌려 어둠 속 물체를 확인하려고 신중하게 빛의 자취를 더듬어나갔습니다.

아뿔싸!

그러다 중지 손가락쯤 되는 길이에 가래떡 굵기 정도로 보이는 바퀴 벌레 2마리와 눈이 마주쳐버렸고,

그 육중한 크기에 저도 모르게 식은땀이 내렸습니다.

그 녀석들은 데이트하는 모습을 들켜버린 것에 심기가 상당히 불편했던 모양입니다.

등짝이 반으로 쫘-악 갈리더니 샛노란 날개를 꼿꼿이 세우고는 날아올랐습니다.

빠르게 대기를 휘젓고 다가오는 갈색 부채를 연상케 하는 날개짓은 시각을,

은행 계수기의 돈이 세어질 때 들리는 것과 같은 등껍질과 날개의 마찰음은 청각을,

미끄러우면서도 딱딱한 등껍질이 얼굴을 스칠 때의 둔탁한 느낌은 촉각을 자극시켰습니다.

세 감각의 조화는 저를 공포로 질리게 만들기 충분했습니다.

목청 찢어질 듯 고함을 쥐어내며 격정적인 몸부림을 쳤고 그 움직임에 따라 오줌 줄기 또한 궤도를 달리했습니다.

바퀴벌레의 입장에서 저를 묘사해본다면

아마 잔디에 원운동을 하며 물을 뿜어대는 스프링 쿨러로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그 원수 같은 친구들과 강강술래하듯 빙빙 도는 것과 동시에 오줌은 꾸준히 뿌려대면서 주변에 영역표시를 해댔습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두 손은 하늘을 향해 펄럭이고 아래로는 금빛 물줄기를 뿌려대며 춤을 추는 듯한 모습이 우스꽝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그렇게 바지와 신발에는 노란 오줌을 잔뜩 묻힌채로 화장실을 탈출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날,

학원을 그만뒀던 것 같습니다.

하물며 일정 기간 동안은 노란색만 봐도 질겁했던 기억도 납니다.


이러한 실전 경험들 덕분인지 빌라에 출현하는 원수 같은 친구들은 나름 귀여운 녀석들로 분류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도 여전히

전기 파리채를 손에 품은 채 잠이 듭니다.

귀여운 건 둘째치고 용서는 할 수 없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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