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무수한 감정과 시간과 감각과 규칙들과 불문율과 사람과 상황과 공간과 생각들의 집합이다. 내가 향유할 수 있는 것들은 나의 삶의 내부를 구성하고 그렇지 못한 것들은 외부에 떠돈다. 나의 집합을 구성하는 원소가 있고 그렇지 않은 원소들이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 생각은 그 원소의 성격이 자유로워 내가 원하는 대로 향유할 수 있으니 참 재밌는 녀석이다.
지금은 목포에서 서울로 돌아가는 고속버스 안, 저녁 8시 44분. 어둠 속에 자잘한 불빛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 불빛들은 누군가의 길을 비추고 있고,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그 빛이 비치는 영역 안에서 그 구간동안 빛을 향유하고, 아무도 없는 길을 비추는 빛들은 앞으로 나타날 누군가를 위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름답다.
할아버지가 헤어질 때 얼른 가라고 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다. 처음 본 할아버지의 우는 모습은 힘이 없었고 더 이상 젊음으로는 회귀할 수 없는 늙은이의 나약한 모습이었는데 그 사실이 나를 아프게 했다.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죽음에는 순서가 없는 법이나) 이에게는 이 헤어짐이 더 깊이 아플까, 아니면 오히려 덜 아플까. 세월에 대한 체념일까, 체념은 아픔일까 무감긱일까. 체념은 내성으로 다져진 무감각일까. 남겨질 사람이 더 아플까, 떠날 사람이 더 아플까. 둘 다 아플 것이다. 사랑하니까. 마지막이 아니길 기도했다.
세월은 무정하게 흐르기에 유정한 사람은 그 세월의 야속함에 더 악착같이 정을 사수하려 한다. 그 안에서 흐르는 눈물들, 짙누르는 감정들, 지울 수 없는 사람들이 있고 그렇기에 삶은 얼마나 총제적이고 집합적인지.
삶이 참 고귀하다.
떠나오는 길에 무지개가 떴다. 할아버지도 무지개를 보셨다면 참 좋을 텐데. 조금 떨어져 있어도 하늘의 무지개는 함께 향유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아름다웠다. 할아버지와의 교집합에 원소가 하나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