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만의 첫 글
글을 쓰는건 사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나는 이 글을 쓰는 일을 10년넘게만에 처음 시작하고 있다
그래서 어렵다
멈춰 있던 시간의 무게만큼, 시작선에서 한 발을 내딛는 감각이 낯설고 불편하다.
몸도 마음도 모두 화석처럼 저 먼 시간속에 굳어있음을 느낀다.
넷플릭스에 <얼굴>이 오늘 풀렸다.
영화관가는 길은 춥고 외로운 사람에게 너무 먼 길이다.
아니 더 솔직하게는 방학인데 애둘이 집에 있고 그 둘을 나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키지 못한채 살고 있는 애엄마의 입장에서 그렇다.
영화 <얼굴>은 많은 구도를 만들어 영화 자체가 묵직한 탑을 이루고 있는 느낌이다.
미추. 선악, 장애와 비장애, 인간의 나약함과 의지, 진심과 왜곡, 일상과 피상, 자의식과 타의식, 목적성과 호기심...
이 모든 관념들이 겹겹이 층을 이룬다.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고 있는 가장 거대한 뼈대는 미추, 아름다움과 추함이다.
여기서 아름다움은 추하지 않음의 반대말에 불과하며 누가 어떤 기준으로 추함을 명명하는가 로 문을 연다. 아버지는 어릴때부터 안보인다는 이유로 구타당하고 괄시받았다고 했다. 어머니는 못생겼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온갖 부조리한 일들을 겪지만 정의로운 목소리를 내고자 용기를 가졌었다. 아버지는 “아내가 예뻐서 좋겠다”는 말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확인했고,
어머니는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진실을 알면서도 그 안으로 스며들어 살아남는 방식을 선택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결핍 위에 삶을 얹는다. 똥걸레 사건만 봐도 어머니가 얼마나 순수하고 착한 사람이었는지 느낄수 있다. 1분만에 오라고 해서 1분만에 와서 바지에 대변을 봐 똥걸레라 불리는 것 또한 그사람에게 있는 것은 미련할정도의 선함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니들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잖아요~~니들말 들었는데 왜 욕은 이사람이 먹는건데?!!
그럼 장애는 기능상의 문제니 덜 추하고 못생긴건 참을수 없다는 그 미묘한 감정을 어떻게 해석해야하는지 물음이 생긴다.
나쁜 사람이 착한척 하면, 그건 나쁜거예요 착한거예요?
라는 어머니 대사는 본질과 피상을 구분짓는다. 원래 나쁜 사람인데 사람들에게 착한척 해서 착한 일을 표면적으로 행하고 있는것과, 원래 나쁜 사람이니 그냥 나쁘게 늘 행동하는 것 중 무엇이 더 낫냐는 질문이다. 한번도 생각해본적 없는 질문인데 이 대사는 영화가 끝나도 계속 점이 찍히며 답을 기다리고 있다.
pd라는 직업을 꿈꿀 때 나 또한 저런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 적이 있었다. 이건 재미가 있을까. 영상에 담고 편집할 때 기준은 하나.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 전문가의 직감으로 어머니의 과거가 더 재밌을거라고 감잡고 선배를 설득하는 그 통화장면은 정말 얄밉고 현실적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아들은 그 목적성을 뿌리치지 못한다. 왜냐면 본인의 호기심을 채우는데에 있어 자신의 노력보다 그들이 더 빨리 채워줄수 있는 힘을 갖고있기 때문니다. 영화는 프레임 안의 프레임, 그안의 프레임이 겹겹이 존재하지만 숨막히도록 모두 현실이다. 개인과 방송국PD의 위계질서는 사회의 가장 겉껍질을 보여준다.
나는 아들이 마지막 어머니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그 시점에 정말로 애타게 어머니가 깜짝놀랄만큼 정상인에 가까운 미인이기 바랬다. 그렇게 되면 어땠을까. 어머니는 예쁜데도 착해서 추하다고 놀림받았고 아버지는 추하다고 생각해서 살인을 저질렀지만 사실은 아름다웠다면. 사실 놀림을 받는 데에는 추함보다 착함이 더 강한 트리거가 있다. 추한데 악하면 놀림받지 않는다. 그것이 당하는 사람들의 비애이다.
아버지보다 어머니는 착했고 이 영화를 관통하는 비극의 시작과 끝이 된다.
요즘 나는 시간만 나면 영화를 보고 있다. 하루에 한 두편씩 정도 보게 된다. 나는 잊고있던 나의 감각을 깨우고 있다. 생각과 느낌과 시각과 용기가 생기면 나도 뭔가 할수 있겠지.
사회의 끈을 놓았더니 드디어 가고싶은대로 표류하는 느낌이다. 노를 젓지 않을 거다.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가야한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가는 것이 유일한 나의 목적이다.
202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