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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유 Mar 26. 2021

인생의 모든 것이 글감이다

박완서 <나의 아름다운 이웃>


박완서 작가의 이전 책들을 무척 재밌게 읽었고, 작가님의 문체를 좋아하는 터라, 이번 책도 책장을 펼치기 전부터 기대가 되었다. 하지만 초반에는 책에 잘 집중이 되지 않았다. 1970년대의 결혼이나 연애관이 너무 올드하게 느껴졌고, 뚝뚝 끊어지는 전개도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책을 읽는 속도가 빨라졌다. 어느새 나는 짧은 단편들을 하나하나 읽어 나가며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이쯤 되면 거장의 필력을 의심했던 것에 사과해야 할 것만 같다.


나에게 '마른 꽃잎'과 '열쇠'라는 글감이 주어진다면?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는 인생에서 만나는 소재들을 얼마나 디테일하게 캐치하고, 얼마나 디테일하게 그려낼 수 있는가에 달려있는지도 모른다.


'책갈피에 꽂아 놓은 마른 꽃잎'이라는 소재로 이토록 디테일한 감정들을 그릴 수 있다니, '아파트 열쇠'라는 글감으로 이토록 세심한 이야기를 쓸 수 있다니. 만약에 내게 누군가 이런 글감을 주고 소설이든, 수필이든, 시나리오든 써보라고 한다면 나는 얼마나 완성도 있는 글을 쓸 수 있을까?


거장은 무엇이 다른가


예전에 박완서 작가의 소설들을 읽으며 거장의 반열에 오른 작가는 역시 다르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주인공이 자연을 떠나 생활하면서 느꼈던 서울생활의 고단 함이라던가 <그리움을 위하여>에서 주인공이 친구에게 느꼈던 조악한 우월감 등은 마치 그 인물이 된 것처럼 생생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나의 아름다운 이웃>의 '땅집에서 살아요', '할머니는 우리 편' 등의 단편에도 아스팔트 위에 시멘트로 지어진 아파트에 살면서 흙과 나무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노파>에서 나물 파는 할머니에게 우월감을 느끼는 이야기는 <그리움을 위하여>를 떠올리게 만든다. 책을 읽는 내내 평범한 삶 속에 담겨있는 이면의 감정들을 이토록 디테일하게 그리는 필력이 부럽고 또 부러웠다.


시대가 변해도 사람의 감정은 똑같다


<나의 아름다운 이웃>의 배경은 1970년대다. 하지만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왠지 지금 내 주변에 있을 것만 같다. 그것은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사람의 속성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1970년대가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찌질함, 질투심, 우월감 같은 감정들은 사람이라면 똑같이 느꼈을 것이다. 갓을 쓰느냐 양복을 입느냐의 차이일 뿐.


책의 단편 중 하나인 '마른 꽃잎의 추억'에서 순수한 낭만을 찾는 여자에게 남자가 말한다. "낭만? 흥, 지금이 어느 때라고. 지금은 70년대야." 맙소사! 70년대에도 낭만이 없다고? 그럼 낭만은 조선시대쯤 거슬러가야 있는 걸까? 아니다 그때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불현듯 태고의 벽화에서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버릇이 없다”라는 말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인생의 모든 것이 글감이다


시나리오 작가의 꿈을 안고 2년 정도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더 이상  그 꿈을 좇지는 않지만 수업을 통해 많은 것들을 배웠고 그것은 지금도 내 글쓰기의 자양분이 되고 있다. 수필, 소설, 시나리오 등 모든 글쓰기는 종류는 달라도 기본 바탕은 비슷하므로. <나의 아름다운 이웃>을 읽으며 시나리오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했던 말이 선명히 떠올랐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과 상황은
글쓰기의 소재가 될 수 있다.
내 인생의 모든 것이 글감이다.  

<나의 아름다운 이웃>은 48개의 짤막한 소설들이 수록되어 있다. 모두 작가 인생의 어느 측면에서든 떠올랐을 글감들일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좋아하는 작가의 인생의 크고 작은 단면들을 함께하는 느낌이라 좋았다.


한편으론, 나도 나만의 글감을 부지런히 만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그것은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때로는 찌질하고 소시민적일지라도 이웃들을 "아름답게" 바라보았던 박완서 작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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