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덕 <아무튼, 목욕탕>
겨우내 추위에 몸을 움츠리느라 목디스크가 도진 것 같다. 건조한 겨울 날씨에 안구건조증도 심해진 것 같다. 목과 어깨가 뻣뻣하고 피로가 쌓인 어느 겨울날, 내가 그토록 그리워한 장소가 있다. 코로나 때문에 가지 못하는 그곳, 바로 목욕탕이다.
사실 코로나 이전에도 대중목욕탕을 즐겨 찾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끔 목욕탕에 가서 온탕에 몸을 폭 담그면, 뻣뻣했던 어깨가 풀리고, 건조했던 눈도 촉촉해지는 느낌이 든다. 수증기 가득한 그 공간이 겨우내 그리웠다. 코로나 덕분에 알게 되었다. 사실 나는 목욕탕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겨울이 끝날 즈음, 목욕탕에 가고 싶은 마음을 진정(?) 시키기 위해 아무튼 시리즈 중 하나인 <아무튼, 목욕탕>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의 저자는 목욕탕을 단순히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예찬론자에 가깝다. 내 집에 아무리 번쩍번쩍한 욕실과 욕조가 있다고 해도 대중목욕탕과는 비교가 안된다고 말한다.
문을 열면 신비로운 공간 바닥에 기본으로 깔리는 훈김이 뿜어져 나온다. 촉촉한 바닥을 딛는 순간 서로 맨살로 대해도 어색하지 않은 여인들의 세상이 펼쳐진다. 나를 한 겹 벗겨 다시 태어난 듯한 기분이 들게 해주는 목욕관리사님도 대기 중이다. - 정혜덕 <아무튼, 목욕탕> -
저자는 단순히 몸을 씻기 위해 목욕탕을 찾지 않는다. 몸과 마음이 지칠 때 목욕탕을 찾는다. 피곤한 몸뿐만 아니라 지친 마음을 쉬는 장소도 목욕탕이기 때문이다. 무기력하고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 때수건으로 손발을 밀고, 발바닥에 각질을 제거하고, 이런 의식(?)들이 깨끗한 몸과 기분으로 생의 의지를 다지게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실언이나 실수에 대한 후회로 마음이 심란할 때도 목욕탕에 간다. 일상에서 한걸음 물러나 자신의 흉허물을 되돌아보는 장소가 목욕탕인 것이다. 이 책의 목욕탕에 대한 묘사는 당장 목욕탕으로 달려가 발바닥의 각질을 제거하고 싶게 만든다. 그렇게 하면 몸의 때와 함께 마음의 때도 벗겨질 것만 같다. 저자의 표현대로 "마음의 부드러운 결"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목욕탕은 지친 마음을 쉬게 할 뿐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나 자신을 '치료'하기에 적합했다. 탕에 들어앉은 지 10분쯤 지나면 얼굴에서 땀이 흘렀다. 그럴 때 조용히 눈물을 흘려도 괜찮았다. 얼굴이 좀 벌겋게 되어도 상관없었다. 사우나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보일 테니까. 목욕탕에서는 몸뿐 아니라 마음에 찌든 시커면 때를 자연스럽게 내보낼 수가 있었다. - 정혜덕 <아무튼, 목욕탕> -
책의 말미에는 저자의 목욕탕 버킷리스트가 나온다. 목욕탕이라고는 집 근처 유명한 찜질방 정도만 가본 나로서는 이런 버킷리스트가 무척 신선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게르마늄 온천에서는 새소리를 듣고 바람을 맞으며 노천탕을 즐길 수 있다. 제주도의 가정집 같지만 깨끗한 목욕탕에서 목욕하고 나서 먹는 '한라 우유'는 얼마나 맛있을까?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목욕할 수 있는 일본의 어느 온천도, 아라고나이트 온수를 공급하는 고급 목욕탕도, 상상만으로도 몸과 마음을 노곤 노곤하게 만든다. 언젠간 나도 그곳에 가보리라는 상상을 해본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목욕탕이라는 주제 하나로 책 한 권을 가득 채울 수 있는 저자의 능력(?)이 놀라웠다. 그만큼 저자의 인생에서 목욕탕이라는 공간에 대한 경험의 비중이 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목욕탕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뭘까? 바로, 개운하게 목욕을 하고 나와서 마시는 시원하고 달달한 바나나 우유다.
어릴 때 엄마는 나와 동생을 데리고 주기적으로 목욕탕에 갔다. 온몸이 빨개지도록 때를 미는 엄마의 손길이 무서워 목욕탕에 가는 게 싫었지만, 큰일(?)을 끝내고 엄마가 사주는 바나나 우유는 나를 목욕탕에 가게 만드는 회유책과도 같았다.
바나나 우유만큼 그리운 게 또 있다. 두 자매의 온몸의 때를 밀어주고도 힘이 넘치던 젊은 시절의 엄마. 팔다리도 매끈하고 피부도 탱탱했던 그 시절 엄마의 모습이다. 코로나가 끝나면 엄마를 모시고 동생과 함께 목욕탕에 가야겠다. 이번에는 동생과 내가 엄마의 때를 밀어드려야지. 그리고 바나나 우유도 사드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