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제주도로 떠나는 아침이다. 해가 뜨지 않은 새벽에 몸통보다 큰 배낭을 메고 문 밖을 나섰다. 밤새 쌓인 눈에 발이 깊게 박혔다. 3월에 내린 눈은 한겨울에 내리는 가벼운 눈과 다르다. 습기를 머금어 묵직해진 눈덩이가 내딛는 발자국마다 끈적하게 달라붙는다.
이미 무거운 배낭에 더한 무거운 발걸음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결국 엉덩방아를 찧었을 때는 진심으로 다시 집으로 돌아가 따뜻한 이불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공항에 도착하니 내가 타야 할 비행기가 지연이 되고 있었다. 쌓였던 눈은 녹았지만 제주도에 부는 강풍이 문제였다. 출발을 해도 착륙을 하지 못하니 출발을 할 수가 없었다. 어찌해야 하는지 몰라서 항공사 직원 분께 앞으로의 예정을 여쭤보았다. 기상 상태에 따라 상황이 좋아지면 늦어지더라고 이륙을 하거나 아니면 결항이 돼서 전액 환불을 해준다고 했다. 계획대로만 되지 않는 게 여행이라더니, 오히려 계획대로 흘러가는 것이 행운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내 의지로 바꿀 수 없는 문제를 마주하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해결 방법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그저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일이다.
선택지라고는 공항에서 기다리느냐 집에 돌아가 기다리느냐였다. 이 무거운 배낭을 메고 다시 집에 돌아가면 다시 나오고 싶지 않을 것 같아서 공항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제주도로 갈 수만 있다면 기다림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탑승구 앞 의자에 앉아서 기약 없는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학교에서 늘 정해진 시간표대로 움직이고 허투루 쓰는 시간은 시간 낭비라고 배웠기에, 예상치 못한 빈 시간에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꼬여버린 일정으로 여러 대책을 세우느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변경된 일정에 맞춰 해야 할 일을 하나씩 적어보았다. 숙소로 가는 마지막 버스 시간을 확인해 보고 그때까지도 못 간다면 숙박 예약을 변경해야 한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날씨가 좋아지지 않아서 제주도를 가지 못하는 경우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허탈감이 밀려와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정오가 지나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시간은 더디게만 흘러갔다. 언제 해결될지 알 수 없는 일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답답하기만 했다. 계속 쳐다보던 시계에서 잠시 눈을 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가 각자의 방식대로 시간을 채우고 있었다. 의자에 기대서 잠을 자거나 핸드폰 게임에 열중하기도 하고, 조용히 책장을 넘기기도 했다. 누구 하나 화를 내거나 짜증 내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당연히 받아들인 채 묵묵히 자신의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인생에는 기다림 외엔 방법이 없는 일들이 있다. 사람과의 인연도 날씨와 같다. 이미 떠나간 인연을 붙잡으려 아등바등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은 안 되는 법이다. 그저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려야 한다. 그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느냐는 각자의 몫이다. 결국 중요한 건 흐르는 시간을 얼마나 잘 기다려내는가이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무사히 제주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면서 오랜 시간을 기다렸지만 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앞으로 또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지만 기꺼이 잘 기다릴 준비가 되어있다. 여행도 인생도 결국 기다림의 연속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