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보다 이른 시간부터 알람이 울린다. 미처 다 뜨지 못한 눈으로 시계를 확인하고 물 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평소라면 오분만 더 하면서 다시 잠에 들었을 텐데 오늘은 그럴 수 없다. 어젯밤에 숙소 게시판에서 본 성산일출봉 일출 시간에 맞춰 늦지않게 나서야했기 때문이다.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일출은 나를 기다려주지않는다.
숙소 사장님이 요 며칠 날씨가 좋지 않아서 일출을 못 봤는데 그날은 날씨가 맑아질 예정이라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신다. 온전한 일출을 볼 수 있는 날이 일 년에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어렵다고 하니 운에 맡겨보기로 한다. 간단히 세수만 하고 서둘러 외투를 입고 나간다.
모두가 잠들어있는 새벽은 고요했다. 내 발자국 소리가 소란스럽게 어둠을 깨운다. 성산일출봉 표지판을 따라가는 길은 인적이 드물었지만 의외로 무섭지 않았다. 앞서 같은 곳을 향해 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어귀에 들어서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낯선 이들인데도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성산일출봉은 대한민국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이 된 곳이다. 2007년 제주도의 한라산 천연보호구역, 거문오름 용암동굴 등과 함께 지정되었다. 약 오천 년 전에 화산 폭발로 만들어져 가운데 사발처럼 파인 분화구를 99개의 바위 봉우리가 둘러싸고 있는데 그 모습이 거대한 성과 같다고 해서 성산이라 불렀다 한다. 어둠 속에서도 인간이 만들어낼 수 없는 자연만의 압도적인 위엄이 전해진다.
입구 매표소에 다다르자 바닷바람이 얼굴을 매섭게 할퀸다. 바람에 밀려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이 들 정도다. 여기서 정상까지 넉넉히 30분 정도가 걸리는데 가파른 계단 길이 이어진다. 3월 초의 일출은 대략 7시경이지만 낮과 밤의 길이가 비슷해지는 춘분이 지나면 해가 뜨는 시간은 빠르게 앞당겨진다.
정상에 오르는 길은 쉽지 않았다. 끝없는 계단을 올라가는데 금세 숨이 거칠어진다. 걸음은 느려지고 뒤에서 오던 사람이 앞서 가면 괜히 마음이 조급해져 빠르게 걷다가도 결국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정상에 가까울수록 거센 바람에 몸이 휘청거린다. 잠시 멈춰 서서 뒤돌아보니 어스름이 깔린 성산리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동화 속에 나오는 마을처럼 평화로운 풍경이 한숨 돌리게 해 준다.
다시 힘을 내서 올라간다. 중간 쉼터에서 앞서 가던 사람을 만난다. 이 길이 힘든 건 모두가 마찬가지다. 중요한 건 누가 더 빨리 올라가느냐가 아니라 모두가 일출시간에 맞춰 끝까지 오르면 되는 것이다.
씩씩하게 먼저 뛰어 올라가는 어린아이들도 있고 연세 드신 어머니의 손을 잡고 가는 아들도 있다. 서로를 응원해 주면서 올라간다. 늦게 오르더라도 누구도 도중에 포기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일출 예정 시간 오 분 전에 정상에 도착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일출을 기다리고 있다. 다 같이 숨을 죽이고 분화구 너머 바다를 향해 바라본다. 날은 밝아오는데 해는 보이지 않는다. 구름이 많아서 둥근 해는 보기 어려울 것 같았다. 예정 시간이 지나자 몇몇 사람들은 기념사진만 찍고 금방 내려가신다. 일출을 보지 못했어도 여기까지 올라온 것에 더 의미를 두고 만족하시는 것 같다.
아쉬움에 잠시 머무르면서 예전에 방목지로 쓰였다는 분화구를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눈부신 강렬한 빛이 쏟아진다. 사람들의 탄성과 함께 구름 사이로 둥그런 해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눈높이에서 정면으로 마주한 햇살은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단조로운 어둠에 싸였던 자연이 순식간에 본연의 색을 되찾는다. 만물을 밝히는 그 빛은 어두웠던 내 마음속 어둠도 환히 밝혀주어 '모든 것이 잘 될 것 같다'는 막연하지만 행복한 기분이 들게 했다.
마주했던 짧은 순간이 지나고 해는 저 높이 제자리를 찾아 올라갔다. 해가 뜨자 거짓말처럼 거셌던 바람소리가 잔잔해지고 맑은 새소리가 뚜렷하게 들린다. 이불속에서 망설였다면 결코 마주하지 못할 풍경이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시계를 보니 아직 여덟 시도 되지 않았다. 태양보다 먼저 시작된 나의 하루는 어느때보다 더 길고 넉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