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걷는다. 제주 올레길 한 코스가 평균 15km 정도로 대여섯 시간을 꼬박 걷는다. 일과는 단순하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과 바다를 곁에 두고, 나무가 뿜어내는 맑은 공기를 깊숙이 들이마신다. 처음 보는 꽃들 앞에서 잠시 멈춰 향기를 맡고 눈에만 담기 아쉬워 사진으로 남긴다. 예쁜 풍경은 새로운 세상에 온 듯했다. 하지만 두세 시간쯤 걸었을 때 발바닥을 찌르는 통증과 함께 금세 현실로 돌아왔다. 가방이 너무 무거웠던 것이다.
여행 며칠 전부터 짐을 쌌다 풀기를 반복했다. 혼자 하는 여행은 처음이라 무엇이 필요한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인터넷에서 여행 준비 목록을 찾아보고 전부 챙겨 넣었다. 가방이 터질 듯해 다시 꺼냈다가 가장 필요한 것부터 차곡차곡 채우고 덜어내기를 수십 번, 결국 커다란 배낭을 메고도 양 어깨에 보조 가방까지 하나씩 걸쳐야 했다. 해외는 아니었지만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하는 먼 곳이라는 생각에 무엇이 필요할지 몰라 더 철저히 준비했다.
그토록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짊어진 건 처음이었다. 숙소에 큰 짐을 내려놓고 걷기용 가방을 따로 꾸렸는데도 여전히 묵직했다. 넘어졌을 때 필요한 반창고, 체기에 대비한 소화제, 여분의 양말과 손수건, 물통과 간식들까지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커질수록 가방의 무게도 늘어났다.
길 위에서 가방을 내려놓고 쉬는 횟수가 잦아졌다. 그때 엄마와 함께 온 아이가 내 옆에 앉아서 쉰다. 아이는 자기 가방에서 물을 꺼내 마신다. 그 작은 가방 안에는 과자 한 봉지, 물, 휴지, 그리고 자동차 장난감 하나가 전부였다. 딱 지금 필요한 것들만 담겨 있어 가벼웠다. 반면 옆에 선 엄마의 가방은 내 것만큼이나 크고 무거워 보였다. 가방 끈에는 아이와 엄마의 외투까지 걸려 있었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한 짐들을 아이의 몫까지 엄마가 대신 짊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그동안 내 삶의 짐이 이토록 무겁지 않았던 건 부모님이, 가족이, 친구가 혹은 다른 누군가가 내 몫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고 있었음을 비로소 되돌아보게 된다.
어른이 될수록 삶의 가방은 더 무거워진다. 홀로 걷는 길 위에서 무엇이 필요한지 선택하는 것도, 그 무게를 감당하는 것도 결국 나의 몫이다. 이 길 위에선 누구도 내 짐을 대신 들어줄 수 없다. 무엇이 정말 필요하고 무엇이 필요하지 않은지는 직접 자신의 길을 걸어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선택하고 스스로 짊어지기 위해 버리든지 가져가든지 둘 중 하나를 결정하는 단호함이 필요하다.
첫날 양발에 물집이 잡히고서 짐을 절반으로 줄였다. 걱정했던 만약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고 설령 일어난다 해도 대부분 그때그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불안 때문에 지금 이 순간 무거운 짐을 질 필요는 없었다. 쓸데없는 짐을 지느라 에너지를 낭비해서 정작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미래를 대비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다음날 짐을 덜어낸 가방을 메고 다시 길을 나섰다. 발걸음이 놀라울 정도로 가벼웠다. 정말 필요한 물건만 짊어지니 마치 발목을 짓누르던 모래주머니를 풀어버린 기분이었다. 무게를 덜어낸 무게만큼 아낀 에너지로 더 멀리 걸으며 더 넓은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경쾌해진 발걸음으로 어제보다 한 걸음 더 멀리 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