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겨울을 이겨낸 무가 달다

by 노란고구마


갑자기 비가 내린다.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했지만 주머니에 넣어둔 우비를 꺼내 입었다. 얼마 전에 마당에서 빨래를 걷고 있는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쳐 인사를 건넸다. 아주머니는 곧 비가 올 것 같은데 우산은 챙겼냐며 걱정하신다.

예보에는 온종일 맑음이라 했는데 의아해하자, 아주머니는 코끝을 스치는 짠내 섞인 눅눅한 공기를 보니 비가 올 게 분명하다고 하신다. 그러면서 집에 남는 우비가 하나 있다며 건네주셨다. 그리고 얼마 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제주도는 일기예보가 잘 맞지 않는다. 하루 종일 맑을 거라던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쏟아지거나 때로는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든 강풍이 몰아친다. 지형적 특성상 한라산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날씨가 제각각이다. 서귀포에 비를 뿌린 구름이 한라산을 넘으며 성질을 바꿔 제주시를 덥게 만들기도 한다.


제주 현지분들은 일기예보 보다 몸으로 익힌 경험과 자연의 신호로 날씨를 맞춘다. 한라산 정상이 뚜렷하게 보이면 맑고, 안개에 가려지면 흐리거나 비가 올 것임을 예상하는 것처럼 말이다.


비를 맞은 푸른 잎들의 색깔이 한층 선명해졌다. 성산 일대에는 무 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제주의 월동무는 전국 생산량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강수량이 많은데 현무암으로 된 토양이 배수가 잘되서 무가 뿌리를 잘 내리는 최적의 환경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 여름에 씨를 뿌려 가을에 솎아내고 겨울에 수확한다.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수확을 마무리하는데 한겨울에도 땅이 얼지 않아 다 자란 무를 뽑지 않고 밭에 그대로 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수확 한다.

그중에서 혹독한 추위를 겪어낸 월동무는 설탕무라 불릴 만큼 달고 맛이 좋다.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무가 스스로 전분을 당분으로 바꾸기 때문이다. 그러나 늦봄이 되면 꽃대가 올라오고 무에 바람이 들어 식감이 질겨진다. 제 맛을 내기 위해서 반드시 겨울이라는 인내의 시간이 필요한 셈이다.


겨울은 무도 사람도 단단하게 만든다. 유독 추운 겨울 날씨가 길어질수록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봄을 기다린다. 누구나 인생의 봄날을 꿈꾸지만 누군가에게 봄은 알아채기도 전에 스쳐 지나가고, 누군가는 온전히 그 따스함을 즐길 수도 있다. 그 여유는 긴 기다림 끝에 찾아온다.

혹독한 추위를 포기하지 않고 견뎌본 사람만이 봄날의 소중함을 진정으로 알 수 있다. 결국 이겨낸다는 건 묵묵히 견뎌낸다는 것이다.

바람이 불고 비가 지나간 자리에 다시 뜨거운 햇살이 내리쬔다. 변화무쌍한 날씨에 적응하기란 여전히 쉽지 않다. 젖은 우비를 가방에 걸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삶의 겨울을 이겨내는 방법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저 모든 계절이 별 탈 없이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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