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다시, 어설픈 20대가 되어버렸다

Welcome back to New York!

by 최용경

지구에서 가장 크고, 블록마다 전혀 다른 얼굴을 가진 도시 뉴욕에서 이십 대를 보내면서 배운 것이 있다. 내가 숨을 거두지 않는 한, 어떤 일도 세상의 끝("not the end of the world")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이 세계 어딘가에는 내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감각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들이 끝없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1년에 한 번쯤 뉴욕을 찾아가는 것도 그 믿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일상은 우리를 너무 쉽게 작게 만들고, 너무 쉽게 굳게 만든다. 우리는 한낱 미물이면서도 동시에 각자의 세계에서는 전부이기에, 너무 빨리 단념할 필요도, 눈앞의 우여곡절을 지나치게 비극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다.


이번 뉴욕행은 업무적인 목표도 제법 있었고, 직항 왕복 비행기 티켓 60만 원대의 행운도 따라서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무엇보다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라 더 설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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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비행을 그닥 힘들어하지 않는 축복받은 체력 덕에 14시간의 비행을 너끈히 겪어내고 JFK보다는 훨씬 깔끔하고 안락한 뉴워크 공항에 도착했다. 15년 넘게 들락날락했지만 여전히 묘한 긴장감이 드는 입국심사대에서 이민국 직원은 내 서류를 들여다보더니 싱긋 웃었다. "Welcome back to New York!" 이제는 전혀 다른 세계처럼 이질감이 느껴지는 뉴욕이 갑자기 친근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불필요한 비용을 아껴보겠다고 신청한 셔틀버스를 타고 맨해튼으로 넘어가는 길, 창밖은 어둠과 불빛이 뒤섞였다. 늦은 저녁이었지만 피곤한 줄도 몰랐다. 20kg짜리 짐가방 2개와 등에는 백팩, 어깨에는 테니스 라켓과 핸드캐리 가방을 하나 더 끌고 타임스퀘어에 내렸을 때는 밤 11시가 훌쩍 넘었다. 타임스퀘어는 초저녁처럼 밝았고, 다양한 인종으로 가득했다. 여전한 앰뷸런스 소리와 퀴퀴한 마리화나 냄새. 역시 뉴욕, 뉴욕이구나. 익숙한 감각이 갑자기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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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의 첫날 밤 & 채영은 그림이 하이라이트인 영은 언니 집에서 너무 편한 자세로 책 읽는 나

뉴욕에 갈 때마다 내게 따뜻하고 멋지기까지 한 공간을 내어주는 영은언니가 특유의 총총 걸음으로 나를 마중 나왔다. 다정한 포옹 후, 우리는 맨해튼 한복판에서 짐을 나눠 끌어 55가의 영은 언니 집으로 향했다. 감사하게도 매번 내 집처럼 편안한 곳. 우리는 와인 세 병을 사이에 두고 쌓아둔 말들을 꺼냈다. 자정이 지나고, 11월 2일 썸머타임이 끝났다. 뉴욕에게 한 시간을 선물 받아버린 이상하고 포근한 밤.




다음 날 아침, 한국에서 바리바리 싸간 직수 정수기를 꺼냈다. GPT와 유튜브, 네이버 블로그까지 꼼꼼히 탐독하고 비장한 각오로 영은언니 집에 직수 정수기를 설치해 주기로 한 것이다.

KakaoTalk_Photo_2025-11-24-00-20-11.jpeg 곧 일어날 사건은 상상도 못한 채 살펴본 매뉴얼.

첫 번째 단계는 바로, 수도 밸브 잠그기. 그런데, 싱크대 아래 어디를 살펴봐도 밸브는 없었다. GPT에 물어보니, 미국 아파트에는 집마다 밸브가 없는 경우도 꽤 많고, 중앙에서 밸브를 통제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우리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그냥 잠깐 밸브를 열어둔 채로 정수기를 빠르게 연결하면 되지 않을까?'라는 어처구니없을 만큼 순진한 발상으로 결국 수도를 분리해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푸하아아아ㅏ"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물폭탄이 우리 앞에 터졌다. 마치 비웃음을 가득 품은 축포 같았다. 집 안을 삼켜버릴 기세의 물줄기 앞에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KakaoTalk_Photo_2025-11-24-00-20-51.jpeg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ㅠㅠ

사람 손으로는 도저히 수도를 다시 연결할 수가 없어서 관리실에 연락을 했고, 관리인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집 안과 복도까지 물바다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이 아파트는 10명이 넘는 관리인들이 있는 데다가 몇 년 전 큰 누수가 있었어서 누수에 대응하는 각종 장비들을 갖추고 있었다. 관리인들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장비를 꺼내어 진공청소기로 물을 빨아들이고, 우리는 그 옆에서 물을 닦아냈다.

몇 시간을 정신없이 움직이고 난 후, 우리는 서로를 보며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정도 멘탈은 있어야 뉴욕에서 살지. 언니랑 이걸 함께하니 이게 또 웃기네.”




물에 흠뻑 젖은 수건 10장을 질질 끌고 세탁소 가는 길. 24시간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업무를 분주하게 마무리하던 내가 다시 이 어설픈 20대의 장면 속으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오늘 웨이트는 이렇게 채우네.’ 거리에는 뉴욕시티 마라톤을 완주한 사람들이 거대한 금메달을 걸고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뉴욕의 일요일 세탁소는 특유의 혼란과 소음이 가득했고,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 사람들의 바쁜 움직임이 한데 섞여 있었다. 지폐를 바꿔주던 주인은 내가 "Gracias"라고 인사하자 반갑게 웃었다. 2008년의 내가 문득 떠오른 그 순간, 입국심사 직원의 말이 떠올랐다. 그의 “Welcome back”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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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가 돌아가는 30분 동안 한적한 카페 한 곳을 찾아 라테를 마셨다. 드디어 빠르게 뛰던 심장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영은 언니와 함께 한 근사한 저녁은 드디어 내가 뉴욕에 왔음을 실감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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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고난도 세상의 끝은 아니다.’ 오랜만에, 그 말이 조금 더 깊이, 진하게 와닿았다. 근데 뉴욕아, 꼭 이렇게까지 알려줬어야 했니?


이번 뉴욕은, 어느 때보다 특별하길 바란다. 해안에 부딪혀 부서져버리는 파도처럼 잊혀지는 추억이 아니라, 조금 더 깊고 오래 남는 파동의 시작이 되길. 이번 뉴욕에서의 순간들이 내 삶의 어디쯤에 잔향처럼 남아, 또 다른 세계의 문을 조용히 열어주는 신호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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