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 LP 바에서

by 이윤지


한계에 달했다.
더 이상 쓸 만한 가면도 없었다.

엄마가 떠나고 복귀한 뒤
나는 상념에 빠지지 않으려고
의뢰가 들어오면 다 하겠다고 했다.

마음을 추스르지 못한 채
하루 종일 여기저기 다니며 방송을 했다.
이날도 앞선 두 개의 스케줄을 하고는
오후 늦게 촬영을 위해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무사히 오늘 하루도 잘 마치려나 싶었는데,
오프닝 대사가 생각지도 못한 난관이었다.
엄마가 떠난 걸 모르는 작가님께서
"우리 엄마도 이럴 때 이렇게 하시더라고요."
와 같은 생활 멘트 한마디를 넣어주셨던 것이다.

수정해달라고 말씀드릴까 하다가
촬영장에서는 이 사실을 아무도 모르는데,
굳이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전체 구성 중 비유처럼 지나가는 작은 부분인데
사실 관계를 따지는 게 유난스러워 보였다.

아무것도 아닌 척 한 큐에 넘겨버리자!
씩씩하게 대사를 치기로 결심했다.

프로그램 성격상 아나운서의 힘찬 오프닝이 중요했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다!'
최면을 걸고 힘차게 시작을 했는데,
갑자기 엄마라는 두 글자가 입에서 나오자
울먹이며 NG를 냈다.

녹화 방송이었기에 천만다행이었다.
'정신 똑바로 차렷!'
겨우 오케이 사인을 받았다.
녹화를 마치고 피디님을 찾아가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개선할 점은 없는지 조언 말씀을 구했다.

의상을 반납하고 시간을 보니 밤 11시가 넘었다.
내일 새벽 방송을 하려면 얼른 집에 가서 자야 했지만
더 이상은 안될 것 같았다.

"1층입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사원증을 찍고
전속력으로 회전문을 향해 갔다.

밖으로 나왔다.
이제는 편하게 있어도 된다.
운 좋게 비도 내리고 사람도 거의 없었다.

회전문을 나서자마자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발걸음이 빨라지자 소금물이 바람에 밀려 웃옷으로 스며들었다.

이대로 집에 갈 수는 없었다.
집에 가면 서로가 걱정을 끼칠까봐 울 수도 없다.

엄마가 좋아하는 노래가 듣고 싶었다.
그 노래만이 있는 곳에 가고 싶었다.
홍대에 LP 바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것 같았다.
무작정 홍대 방향 버스를 타고 검색을 했다.
홍대 어딘가 정류장에 도착하자 우산을 쓰고 빠르게 걸었다.

'저기 보인다.'

풀메이크업에 정장 구두 차림이었지만
거기까지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다행히 LP바의 조명은 어두웠고
둘러보니 가운데 한 커플만이 있었다.

서둘러 가장 구석진 곳을 찾아가 앉았다.
뭐 하나는 시켜야 한다고 해서
깔루아밀크를 주문했다.

곧장 카운터로 갔다.
"노래 종이에 써서 드리면 틀어주시나요?"
주인처럼 보이는 아저씨는 맞다고 했다.
하얀 종이와 볼펜을 받았다.

서둘러 자리로 와서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 세 곡을 적어 빠르게 카운터로 가져갔다.
목록을 본 아저씨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오래된 노래인데 어떻게 아냐고 했다.
그냥, 틀어달라고 했다.


이제 준비는 다 되었다.

자리로 와보니 테이블 위에
우산이 꽂혀있는 깔루아밀크가 도착해있었다.
깔루아 밀크에 우산이 꽂히던가? 다른 음료였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그건 중요하지 않다.
한 입도 대지 않았다.

노래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지금 나오는 곡은 좀 긴 노래인가 보다.



'아!'

그 때 Deep Purple의 Soldier Of Fortune이 흘러나왔다.
기타 선율이 시작되자,

나는 테이블 아래로 들어가 최대한 몸을 숙였다.
고개가 구두에 닿도록 구겨 넣었다.
내가 펑펑 울 수 있는 시간은
노래 단 세 곡이 흐르는 동안뿐이었다.

주어진 시간 안에
있는 힘껏 내 안의 모든 걸 흘려보내야 했다.

The Animals - The House Of The Rising Sun
Rainbow - Temple Of The King

까지. 세 곡이 함께하는 동안
시원하게 모든 응어리를 쏟아내었다.

신청곡이 모두 흘러나온 뒤
정확히 하나의 메시지가 나를 관통했다.

"고생 많았구나.
근데 이제 일어나야지."

일어나라고 했다.
다시 일어서서 살아보라고 했다.

얼른 짐을 챙겨 계단 위로 올라갔다.

내일 새벽에 일어나려면
지금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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