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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이의 꿈

by 이윤지


"늦어서 미안해요. 잘 지냈어요?"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빨간 블라우스를 입고 약속 장소에 미리 앉아있던 그녀는
오늘도 무척 예의 바르게 고개 숙여 인사해주었다.

실수로 옆 건물에 주차를 한 뒤 부랴부랴 달려온 나는
얼른 인사를 건네고 메뉴판을 바라보았다.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정확히 두 시간 반이었다.
기업의 대표인 그녀는 스피치에 대한 진단을 받고 싶어 했고
수업이라기보다는 점심식사를 하며 편안하게 봐주기로 한 터였다.

성격적으로는 나도 한 털털하는데 그녀는 저 세상 위 순수 털털이었다.
호탕하게 잘 웃어주는 그녀를 보니 착한 동생 같기도 하고
개그우먼 기질이 발동해서 자꾸 웃겨주고 싶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내면에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대화 중 우연히 그녀가 키우는 닭 이야기가 나왔다.

"닭을 키운다고요?"

깜짝 놀라 커다란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그녀는 아이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관상용 닭으로 키우는 꼬꼬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열 개의 알을 분양받아 20여 일 간 부화하기를 기다렸는데,
열 마리 중 세 마리만 태어났고 그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이라고 했다.

'어머 이건 세상에 이런 일이잖아!'

햇살을 받으며 물을 먹는 모습이 어찌나 예쁘던지 엄마 미소를 짓게 했다.
총총총 거실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는 앙증맞은 점프도,
사람의 어깨에 포옥 기대어 자는 모습도 정말이지 사랑스러웠다.
이야기도 재미있었지만 무엇보다 꼬꼬 이야기를 하는
그녀의 눈빛이 순수하고 맑게 느껴졌다.

다시 일 이야기로 돌아와 사업에 대한 대화를 이어가는데,
문득 그녀가 열정을 다하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에너지의 중심이 무척 단단해 보였다.

"혹시 사업을 일찍 시작하고 이렇게 열심히 하게 된 계기를 여쭤봐도 될까요?"

그녀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조심스레 이야기를 건넸다.

"이건 부모님께도 말씀 안 드렸는데… 처음 말하는 거예요."

내가 들어도 되는 걸까, 조용히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지금은 30대 초반인 그녀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가까이 지내던 친구가 있었다.
대학생 시절 그 친구는 미용을 배우는 것이 꿈이었다.
주위에서는 친구에게 미용 분야에서 성공을 하려면 유학을 다녀와야 한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마침 스물두살에 영국으로 교환학생을 갈 예정이었던 그녀는 친구에게 같이 가자고 권유했다.
친구는 망설였고 그녀는 영어 스피킹 학원을 같이 등록해 거의 데리고 다니다시피 했다.
학원을 다니면서 그 친구도 유학에 관심이 생겼고 두 사람은 함께 공부하러 가기로 약속했다.
교환학생 준비를 마친 그녀는 먼저 영국으로 날아갔고 친구는 몇 달 뒤 올 예정이었다.

영국에서 그녀는 어느 날 전화 한 통을 받는다.
불의의 사고로 친구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친구는 그 스피킹 수업을 다녀오던 길에 사고가 났다.

소식을 듣고 그녀는 실감이 나지 않아서
그 어떤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것이 그녀에겐 큰 죄책감이었다.
아니, 친구가 떠났는데 어떻게 눈물조차 안 날 수가 있지?

정적이 흘렀다.

사실 난 그녀가 이야기를 시작할 즈음부터 결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친구에 대해 말할 때마다
"- 했다. -었다." 모두 과거형으로 말했기 때문이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내가 가장 슬픔을 느꼈던 때는,
어느 순간부터 엄마에 대해 말할 때
모든 문장에 과거형 동사를 넣고 있다는 걸 깨달았던 순간이었다.


그녀에겐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고 했다.

친구가 세상을 떠난 해의 1월 1일 두 친구는 해돋이를 보러 갔다.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두 사람은 소원을 빌었다 한다.
그때 22살 친구의 소원은 미용 분야의 사업을 해서 성공하는 것이었다.
그녀 또한 막연히 어떤 사업을 해서 성공하겠노라 다짐했다.

그녀는,
자기가 그 친구의 마지막 소원을 들은 유일한 사람인 것 같다고 했다.
친구의 꿈을 대신 이뤄주고 싶다고 했다.

지금 하는 사업에서 꾸준히 성공한 뒤
미용 분야에 투자를 하거나 관련 분야로 확장을 하리란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미용 사업과 관련하여 어떤 방향으로든 이윤이 생기면,
그로 인해 얻은 수익 전부를 친구의 이름으로 기부할 것이라고 했다.

그 친구의 부모님을 그녀는 엄마, 아빠라고 부른다.
친구의 이름으로 기부하게 되는 그날.
이 이야기를 그분들과 그녀의 부모님에게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털털하고 허허 웃기만 하던 그녀는,
중간중간 목젖의 울림으로
가슴속 소중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의 이야기로 우리는 기승전-결을 향해 갔다.

"난 스물여섯살에 갑자기 엄마가 세상을 떠났어요.
그 믿을 수 없는 감정이 뭔지 잘 알아요.
실감도 안 나고, 눈물도 나지 않는 이상한 감정이죠.

잠시 지구 반대편에 있는 건 아닐까?
전봇대 모퉁이 뒤에서 잠시라도 바라볼 순 없을까?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온몸이 마비되는 것처럼
눈물도 나지 않는 슬픔이 계속되었어요.

난 강의를 하겠다고, 방송 조금 더 잘해보겠다고
엄마랑 영화 한 편 보지 못하고 소중한 시간을 놓쳐버렸어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게나 소중한 시간을 포기하면서까지 택한 일인데
그래도 나중에 엄마가 봤을 때
그 분야에서 뭔가는 하고 있어야 하지 않겠나 하고요.

나의 꿈은 엄마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 서점에 자리하고
그 책을 본 독자들이 혹시라도 놓칠 뻔한 소중한 순간들을 붙잡는 거예요.
그리고 김미경 선생님처럼 강연을 하고 싶어요.
그렇게라도 하면 엄마한테 덜 미안할 것 같아요."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세상을 떠난 두 사람은 그런 거 바라지도 않는다고.
우리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지도 못할뿐더러
세상을 떠난 그들을 위해 열심히 산다는 건
당신들의 과한 해석이며 합리화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거나 나는
친구의 소원을 이뤄주고 싶은 그녀의 마음에 깊이 공감했다.
이건, 남은 이들을 위한 꿈이었다.
그거라도 하면 나중에 세상을 떠날 때
마음이 덜 미안하고 후회가 덜 되겠지.

그녀는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했다.

그러고는 다시금 수줍은 미소로 휴대폰으로 뭔가를 찾아 보여주었다.
마음을 다지기 위해 매일 보는 문구라고 했다.

'사람은 누구나 열심히 살아가지 않는다.
뜻이 있고 꿈이 있는 사람 만이 열심히 살아간다.'


아이를 태우고 집으로 가는 길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글로 남겨도 될까요?
호탕하게 웃으면서 아유 저야 감사하죠 했다.


그녀는
만약에 나중에 우리가 잘 되면
와인 한 잔 마시며 같이 글을 읽어보자고 했다.


그 날이 올까,

그 날이 온다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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