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과 옷을 한 아름 안고 세탁소로 가는 길.
바깥 바람에 신난 아이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조심해. 차 들어온다!”
옛 드라마에 나올 법한 진부한 대사를 외치며
아이의 작은 손을 꼭 붙들어 잡는다.
가는 길가엔 꽃과 나무가 많다.
“엄마! 밍들레야. 밍드레!”
오늘도 시작된 민들레 사랑에 목적지는 잠시 지워본다.
앞으로 적어도 다섯 번은 더 멈추어 서야 하기 때문이다.
이참에 나도 자연 탐구나 해볼까?
키가 높다란 민들레도 살펴보고,
옹기종기 모여있는 황갈색 버섯 두 쌍도 구경했다.
아이는 하얀 무언가를 들고 바삐 가는 개미를 발견했다.
오래도록 바라보기에 한 마디 건넸다.
“개미가 먹을 거 들고 어디로 가지?”
“엄마 만나러 가요!”
아! 개미가 엄마를 만나러 가는 거였구나.
말을 시작하고 나서 아이의 이야기를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빨랫감을 맡기고 돌아오는 길.
단지 안쪽을 보니 장이 섰다. 아이는 신나게 뛰어간다. 장날이라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단골집으로 가 삼천 원을 내고 옥수수가 담긴 검은 봉다리를 건네받았다.
기어코 들고 가겠다는 아이에게 아주머니와 나는 동시에 "뜨거우니 조심해야 한다!" 짐짓 무섭게 외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꾸러기 걸음에 봉다리가 좌우로 신나게 흔들린다.
한 번에 집에 가나 싶더니 금세 봉다리 바이킹이 멈추었다.
새로운 개미를 발견한 것이다.
“얼른 와. 집에 가서 옥수수 먹자!” 복식호흡으로 외쳐본다.
아차, 벌떡 일어난 아이가 와다다 달려온다.
집에 들어와 손을 씻고 거실에 앉아 옥수수를 꺼냈다.
아직 뜨거웠다. 포크를 가져와 코코콕 찍어 아이에게 먹여주니 아기새처럼 입을 쫙쫙 벌린다.
장터에서 파는 옥수수는 유난히 달콤하다.
금세 하나를 뚝딱한 아이의 표정이 만족스러워 보인다.
배부른 듯 누워서 자리를 잡은 아이는 “아빠 언제 오시지?” 혼잣말을 하였다.
종일 아이와 뒹굴다 보니 나도 생각의 흐름을 쉬이 따라간다.
나이 무쟈게 많은 큰 딸 마냥 ‘아빠 언제 오지?’ 같은 생각을 하며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는 모양새로 아이와 오래도록 누워 있었다.
문득, 엄마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내가 일하러 갈 때 엄마는 자주 자동차로 데려다주었다.
차 안에는 늘 엄마가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왔는데, 그날의 선곡은 김영임 님의 ‘어부의 노래’였다.
"어머님은 된장국 끓여 밥상 위에 올려놓고 고기 잡는 아버지를 밤새워 기다리신다."
가사가 흘러나오자 엄마는 따스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리는 단순한 거야. 엄마는 이 가사가 정말 좋아.”
우린 한강 다리를 건너고 있었고 나는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보며 조용히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진리는 단순하다는 말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된장국을 끓여 아버지를 기다리는 평범한 가사가 뭐가 좋다는 건지.
진리는 단순하다는 것과 이 내용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
마음에 온전히 와닿지는 않았다.
올해 들어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라는 시간의 개념을 말씀과 책을 통해 여러 번 접하였는데 혹시 이런 의미는 아닐까 생각해본다.
시간에는 크로노스와 카이로스가 있다.
크로노스는 우리가 일상에서 보내는 단순히 흘러가는 시간이다.
하루 24시간 초침, 분침, 시침이 정확히 일러주는 개념이다.
카이로스는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는 시간이다.
살다보면 물리적으로는 길지 않지만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있다.
가령, 사랑하는 사람을 처음 보았던 순간, 누군가와 마음이 통하는 대화를 나누며 까르르 웃었던 순간 등이 그렇게 느껴질 수 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흘렀어?', '내가 잠시 어디 다른 곳에 다녀온 건 아닐까?' 처럼
카이로스는 마치 시간의 왜곡이 일어난 듯 느껴지는 의미 있는 순간들을 말한다.
엄마와의 추억 중 카이로스로 느껴지는 시간들이 있다.
학창 시절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동네 투다리에서 우동을 먹으며 엄마와 수다 떨던 시간들,
성인이 되어 일 마치고 들어와 엄마와 침대에서 마주 앉아 새벽 두세 시가 넘도록 깔깔 거리며 이야기 나누었던 시간들은
지금도 그저 떠올리기만 하면 나를 무척 행복하게 해 준다.
엄마와 보냈던 카이로스의 순간들을 당시에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덕분에 내가 지금 무척 행복하다고. 고맙다고 말씀이라도 드렸을 텐데 말이다.
다시는 소중한 순간들을 놓치고 싶지 않다고 간절히 여기며 살다 보니
종종 '내가 지금 특별한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 하고 느껴지는 때가 있다.
그런데 하나같이 '어부의 노래' 가사와 같은 순간들이다.
엄마의 간지럼에 숨이 넘어가도록 깔깔 웃는 아이를 바라보았을 때,
아빠 어깨 위에 목마를 타고 행복해하며 걷는 두 사람을 보았을 때,
아이와 누워 "아빠는 언제 오시지?" 하며 뒹굴뒹굴 껴안았을 때,
그리고 민들레를 구경하는 아이의 맑은 눈망울을 바라보면서
엄마가 이 순간을 보았다면 참 좋아하셨겠다고 생각했다.
"그리워라 그리워라 푸른 물결 춤추는 그곳 저 멀리서 어머님이 나를 부른다."
올 초까지만 해도 이 노래를 끝까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
눈물이 나서 금방 꺼버렸기 때문이다.
엄마가 좋은 곳으로 가신지 팔 년이 흐른 뒤
마침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최근에 처음으로 편안한 마음으로 전곡을 감상했다.
아마도, 이렇게 글을 쓰고
다시금 엄마가 내게 해 준 이야기들을 정리하면서.
그리고 세월이 덧입혀지면서.
당시엔 이해가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조금씩 헤아려지는 덕분인 것 같다.
나중에 할머니가 되어 이 시절을 떠올렸을 때
좀 더 잘해줄 걸 그랬지. 미안하다가 아니라
덕분에 많이 웃어 고맙다. 덕분에 내가 참 행복해서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거란다. 말해주고 싶다.
지금 무심코 다가오는 이 순간들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귀하게 살아내는 것은,
나의 마음에 달려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