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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기에 날개를 달고 싶다면

작은 과녁을 향해 날리는 화살

by 이윤지

스피치 발표를 앞두고 연습하다 보면

딱 이 장소에서, 딱 이 사람들 앞에서, 딱 이 분위에서 하면 정말 잘하겠다 싶은 경우가 있습니다.


발표날 되도록 내게 긴장감을 주는 저 사람만은 없었으면 좋겠고요.

눈에 거슬리는 벽시계는 좀 떼어버렸음 싶기도 합니다.

말하는 중에 새로운 가 들어오면 흐름이 끊기기에 문도 꽉 닫혀있었음 하고요.


살아가면서 우리는 자의로든 타의로든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요.

내가 딱 상상한 대로 무대가 펼쳐질 확률은 어느 정도 될까요?


아마 1% 만 되어도 기적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 삶엔 변수가 많습니다.


아무리 무대 환경을 완벽하게 세팅했더라도

지나가는 참새의 날갯짓에 까치가 울고 개가 짖기 시작하서 관객들이 웅성거릴 수도 있니까요.


눈을 직접 바라보며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인터뷰어의 큰 매력입니다.


방송 진행 안에서도 아나운서의 모습은 다양합니다. 뉴스 앵커, 프로그램 MC, 라디오 DJ, 행사 진행자, 인터뷰어, 때로는 스피치 교육자가 될 수도 있겠지요. 모든 직군이 다 매력적이지만 사람의 눈을 바라보며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인터뷰어 역할을 참 좋아하는데요.


방송을 하면서 감사하게도 적어도 오백 번은 넘는 인터뷰를 해온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긴장감이 높았던 인터뷰 순간을 잠시 나눌까 합니다.


큰 지역의 리더를 인터뷰하는 자리였는데요.

촬영 시작 시간에 맞추어 등장하는 인터뷰이의 에너지가 어찌나 어마어마하던지 넓은 공간을 꽉 채우는 듯했습니다. 말솜씨 또한 청산유수였습니다.


저는 평상시에는 무척 정중히 인터뷰이를 대하는 편인데요. 그러나 큐 사인이 들어오고 인터뷰어로서의 롤이 정확히 시작되면 동등한 위치로 당당하게 질문을 건네기 시작합니다. 물론, 편안한 분위기의 기획이라면 그에 맞추어 또 달라지지만요.


적어도 당당함을 잃지 않고자 하는 이유는 진행자는 '방송을 시청하는 모든 이들을 대변하는 자리' 로서 인터뷰이의 앞에 앉아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러나 우선 당당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실력을 갖추고 있어야겠지요?


이날 인터뷰를 하러 3시간이 넘도록 방송 차량을 타고 달려가는 동안

쏟아지는 잠을 이겨가며 질문 부분을 외우고 또 외웠던 기억이 납니다. 유난히 대사도 길고 어려운 단어도 많았기에 반복 또 반복을 했습니다.


휴! 이날 준비를 철저히 했길 천만다행이었습니다. 인터뷰이가 이 정도로 내공이 깊은 분인 줄은 몰랐거든요. 상대방이 흠없이 완벽하게 리허설을 술술 풀어가니 장풍이 날아오는 기분이었습니다. (나는 이 프로그램의 진행자인데! 적어도 말에서 만큼은 밀리면 안 돼! 콩닥콩닥.)


큐 사인이 들어온 후 부드럽게 방송이 시작되었고 길었던 오프닝 멘트부터 이어지는 질문, 클로징까지 한 번의 NG도 없이 그분과 방송을 깔끔하고 즐겁게 마쳤습니다.


인터뷰 내내 겉으로는 아무런 특이사항이 없었지만, 방송을 다 마치고 저는 후들후들해진 다리를 높은 구두로 지탱하느라 발끝에 힘을 단디 주어야 했습니다. 내내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엄청나게 에너지를 많이 썼기 때문입니다.

방송이 끝나고 그분을 보좌하는 한 분이 나가면서 심코 말씀하시더군요.

“지금까지 많은 분들이 인터뷰했는데 그중 제일 잘하시네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웃으며 툭! 하고 네주신 한마디가 그날 얼마나 큰 힘으로 다가왔는지 모릅니다.

그날만큼은 저도 제 자신에게, 고생했다고 토닥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날 특별히 잘 한 것은 없었습니다. 아나운서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맡은 일을 한 것이었 때문입니다.

굳이굳이 겨우 꼽아보자면 한 번도 틀리지 않고 인터뷰이 흐름에 맞추어 NG 없이 이끌어갔다는 점인데요. 사실 이것은 인터뷰어의 기본 자질일 것입니다.


그나저나,

유난히 중압감이 가득했던 이날

제가 실수하지 않을 수 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합니다.


이 전에 수백 번의 '경험'을 했었기 때문입니다.


수만명 앞에서 무반주로 남행열차를 불렀던(뜨아!) KBS 가요무대 사전진행 현장

결코 뛰어나서가 아니라, 이런저런 변수들을 사전에 경험해보았던 덕분에 인터뷰 한 건을 후룩! 털어낼 수 있었던 것인데요.


물론, 아무리 경험이 적지 않은 저도 얼마든지 방송을 하다 실수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여러 번 머리가 하얘져보고, 말이 꼬여보았던 사람은 그 다음번에는 적어도 이전보다는 0.001 % 는 좋아질 것이 분명합니다.



하얀 겨울, 대학 수업 시간 중 교수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를 끝으로 나누고자 합니다.

학과장으로서 언제나 프로페셔널하고 멋진 교수님이셨는데요. 어느 날 수업에 앞서 이런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나는 늘 성공만 하는 인생을 살아왔는데, 돌이켜보니 내가 완벽히 잘할 수 있는 길만 걸어갔기 때문인 것 같아.”

그러면서 교수님은 크고 작은 과녁 이야기를 들려주셨니다.


원이 작은 과녁과 원이 커다란 과녁이 있다고 한다면, 교수님께서는 10점을 맞추기에 유리한 커다란 과녁만 맞추며 살아오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100% 잘하고 익숙한 길만 선택해 걸어오셨기에 늘 성공할 수 있었다는 말씀이셨는데요.


그날 교수님은 무척 슬퍼 보였습니다.


말씀을 들려주시는 내내 어찌나 힘이 없으셨던지 괜시리 이입된 저는, 수업이 시작된 후에도 창밖에 내리는 눈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최고로 성공 교수님 같은데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


그런데 그 후로 10년도 넘게 흐른

문득 그 말씀을 하시던 교수님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만 같습니다.



커다란 과녁은,

우리가 100% 잘할 수 있는 길입니다.


스피치로 예를 들어 보자면,

이미 내가 여러 번 이야기해본 주제라든지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만 관객으로 자리하는 무대가 커다란 과녁이 되겠지요?


커다란 과녁을 추구하는 사람은

어떤 말하기의 기회들이 다가왔을 때

조금이라도 두렵고 긴장되는 자리들은 우선 거절할 것입니다.

이미 익숙하거나 자신 있는 자리만 승낙하며 성공. 성공. 성공. 을 이어겠지요.


사람들이 보았을 때는 '와! 저 사람은 뭘 하든 늘 잘하네!' 할 수 있습니다.


음. 아니요. 좀 더 솔직히 말씀드리면

사람들은 이러나저러나 큰 생각이 없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내가 얼마나 완벽하게 진행했는가 혹은 내가 몇 번의 실수를 했느냐에 생각보다 크게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배제하고!


세상에 나와 나만의 대화가 있다고 해볼까요?

100% 의 승률만 자리하는 과녁만 늘 맞춘다면

당장에 기분은 찮을지 모르겠지만

'성장'의 측면에서는 발전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재미도 좀 떨어지고요.


작은 과녁은,

내가 잘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는.

두려움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그러나 왠지 한 번쯤은 도전해보고 싶은.

이상하게시리 안 해보면 후회할 것 같은.


_ 가지 않은 길입니다.


과녁 자체가 너무 작아서 점수를 내기조차 힘들지도 모릅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 서서 나를 어필해야 하고요.

너무 많아서 구별하기도 힘든 구름 같은 사람들 앞에서 무려 한 시간 동안이나 대본에 없는 이야기를 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손발이 떨리고 머리가 하얘지는 듯합니다.


그러나 말하기에 작은 날개를 달 수 있는 길은,


나의 직속 상사가 떡 하니 앞에 자리하고,

째깍째깍 시계가 나를 노려보고 있으며,

수시로 사람들이 관객석을 들락날락하는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마치 집에서 말하기를 하는 것과 같이 느껴질 수 있는 자유한 길은,


바로 작은 과녁들을 수없이 마주하는 것입니다.


무대 위에 서서 한 마디도 못 하다 내려와도 괜찮습니다.

대본 들고 있는 손을 바르르르 떠느라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모두 다 저의 이야기 인걸요.


말하기 공부방 선생님으로서는 흑역사일지도 모르겠지만

저에겐 너무도 소중한, 작은 과녁을 향해 화살을 날리던 귀한 경험들입니다.

그래도 이 작은 과녁을 정신없이 쏘다 보니

아주 가끔 10점에 명중하는 얼떨떨한 행운을 맞보기도 하고

여기저기 0점에 잔뜩 쌓인 화살들은 어느덧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방패막이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선생님 저는요~ 딱! 이 상황만 아니면 다 잘할 수 있어요."


혹시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딱 그 상황이 있으신가요?

와! 우선 그런 경우를 알아차리셨다면 축복받으신 것입니다!

나를 불안하게 하는 그 상황을 눈 딱 감고. 딱 한 번만. 두 번만 마주해보신다면...*

"어느 상황이든 기회만 주세요! 애니 타임! 애니띵!"


훨훨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는 여러분을 발견하게 되실 겁니다.

내가 예상한 무대와 다른 99%의 변수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더 즐겁게 날아다니게 되실 거예요.


그때 다가오는 기쁨은 생각보다 작지 않습니다.

그 기준 또한 생각보다 높지 않습니다!


그 기준이란,

어제보다 0.001% 나아진 나 자신을 바라보며

스스로가 뿌듯하고 즐거우면 되는 것 이거든요^^

우리 말하기 공부방분들이 모두 함께 훨훨 날아다닐 수 있기를 바라며!

여러분의 행복한 말하기를 언제나 응원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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