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이가 되었다

선물같은 인터뷰글을 써야겠다

by 그냥

이 글은 내 이야기지만 내가 쓴 글은 아니다.

은유 작가님의 <감응의 글쓰기> 수강생이 나를 인터뷰해서 쓴 과제글이다. 그동안 수없이 사람 만나 인터뷰하고 글을 썼지만 내가 인터뷰이가 된 건 처음이었다. 글 읽는데 자꾸 눈물이 났다. 내 삶을 다른 이의 목소리로 들으니 공감과 지지를 받은 느낌. 큰 선물을 받은 것 같다. 내 인터뷰이들도 이렇게 느끼셨을까. 앞으로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더욱 애써야겠단 다짐을 했다.




나의 자존심, 나의 확신

구술 : 바람(심혜진)

청중 : 반려묘 미미, 코코

정리 : 릠​


6살 때 기억이 난다. 도요새인가 솔개인가 무슨 새 노래를 실로폰으로 쳤다. 미닫이문 밖에서 엄마가, “네가 친 거냐, 라디오에서 나온 거냐?”물으셨다. 뭘 잘못했나 싶어 눈치 보며, “…내가 쳤어요.”했다. 그때 엄마가 결심했단다. ‘쟤는 피아노 절대 시키면 안 된다. 싹을 잘라야 한다.’ 돈 나갈 일을 애초에 막은 거다. 나는 피아노 배우고 싶은데. 언니는 미술학원에 가고 동생은 태권도학원에 다니는데 왜 나는 아무데도 안 보내줄까. 하모니카, 리코더도 혼자 배웠다. 꿈에서 내 피아노만 소리가 안 나고 작아지고 부서졌다.


중2때 아버지가 친척 집에서 통기타를 얻어왔다. 뭐든 보면 금세 따라하는 아버지는 주로 뽕짝을 연주하셨다. 난 천 원짜리 교본을 사와 코드 연습을 했다. 양희은-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누구 노래더라? 꽃반지 끼고, 책에 있는 코드를 다 외웠다.



- 우레


고등학교 1학년 음악 시험이 악기 연주였다. 각자 가진 악기로 클래식 곡을 연주하란다. 다들 피아노 아니면 리코더를 한다고 했다. 난 둘 다 싫었다. 자존심이 상해서. 기타 학원에 다니는 친구에게 같이 <Perhaps Love>를 하자고 했다. 샘한테 물으니 팝송이라 안 된단다. 열심히 하겠다고 조르고 졸라서 겨우 허락을 받았다. (눈물) 내 기타는 뒷면이 휘어있고 친구 건 새 거였다. 케이스도 내 건 낡은 가죽, 그 애는 깔끔한 학생용 케이스. 무지 창피했다. 애들은 내가 간지난다고 했지만. (웃음) 매일 녹음기를 가져가서 치고 들어보며 연습했다.


시험 날… 그런 우레와 같은 박수는 처음 들었다! 심지어 다음 음악시간에 샘이 한 번 더 듣자고 했다. 그날은 기타가 없다고 했더니 노래라도 들어보자 하시더라. 친구와 화음을 맞춰 불렀다. 초등학교 때부터 앞에 나가 독창을 자주 했다. 목소리가 곱다고.

음악을 하면 참 잘 할 거 같은데, 지원을 못 받으니 꿈이 없었다. 초등학교만 나오신 어머니 아버지는 항상 삼남매에게 이 지역을 벗어나지 말 것, 공무원이 될 것을 강조하셨다. 00대에 입학해서 클래식 기타 동아리에 들어갔다. 배운 가닥대로 엠티 가서 쳤더니 동기들이 열라 잘 친다고 놀라더라. 그런데 활동은 잘 못했다. 알바를 세 탕씩 뛰느라. 공부를 잘 해도, 음악을 잘 해도 인정해주지 않는 집에 손 벌리기가 싫었다.



- 배부른데 행복하지 않았다


00시 교육행정직 공무원을 2등으로 합격했다. 비서실에서 전화 받고 커피 타고 청소했다. 1년에 두 번씩 월급이 오르는데, 불행했다. 일을 배우고 싶었다. 학교로 보내 달라 요청해서 소위 ‘좋은’ 학교로 발령이 났다. 밀린 돈을 받아내는 게 내 일이었다. (눈물) 나와 닮은, 가난한 아이들에게 미납금 독촉을 해야 했다. 교사들은 아무 관심이 없었다. 4년 만에 그만뒀다.



학원 강사를 병행하며 여성회 시민단체에 들어갔다. 진짜 똑똑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곳에 50만 원짜리 바바리를 못 입고 갔다. (눈물) 학교 선생님들은 150만 원짜리 바바리를 입고 다녔는데. 여기 사람들은 가난해도 이렇게 살고 싶어 했다. 집회 따라다니고 광주도 가보고, 재밌었다. 무슨 얘길 해도 여기선 수용이 됐다. 일하다가 노래 잘하는 친구를 만났다. 직장인 밴드의 보컬, 걔가 너무 좋아서 세컨기타로 들어갔다. 일렉 기타를 매고 긴 머리에 망사스타킹을 신은 사진이 페북에 있다. 누가 ‘쌍코피 터진다’고 댓글 달아놨더라. 친구가 미국에 가면서 나도 기타를 놓았다. 2011년, 34살이었다.



- 아주 잘 하고 있어요


친한 언니가 집단상담 치유연구소에 다녔는데 나한테 빈자리가 있으니 한번 가보라더라. ‘산’이라는 별명으로 들어갔다. 호기심에 왔지만 4-50대 여성들만 있어서 거부감이 들었다. 살아온 이야기를 써서 돌아가며 낭독을 했다. 내 차례가 왔을 때 숨도 안 쉬고 다다다 읽었다. 나를 알아줄리 없다고 여겼으니까.

“어떤 마음으로 읽으셨나요?”

그분들은 지적하지 않고 의사를 물어봐주었다. 나에 대해서 궁금해 하고 질문해 주는 어른을 처음 본 거다. 마음이 서서히 열렸고 매주 울면서 집에 갔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이제야 알겠어서 매번 집에 전화해서 따졌다.

“나를 왜 낳았어? 잘 키우지도 못 할 거면서?”

내 상처를 모르고 산 게 훨씬 나은 것 같았다. 일상이 안 될 정도로 슬프고 힘들어서 그만두겠다고 했다. 나는 우는데 듣고 있던 분이 웃으며 말했다.

“산, 아주 잘 하고 있어요. (일동_혜진, 릠, 미미, 코코_눈물 폭발) 나를 믿고 지금처럼 하면 돼요.”

그날은 집에 갈 때 울지 않았다. 내가 최초로 사랑한 중년여성들이다.



- 글


근데 지하철에서, 갑자기, 글을 써야겠단 생각이 드는 거다. (머리에 손을 대며) 환해지는 느낌이 왔다. 아버지도 언니도 글을 잘 썼다. 어려서부터 신문 논설을 읽어왔다. 내 논리를 찾고 싶어서. 회사에선 성명서를 맡아 썼고, 블로그에 일기를 꾸준히 써왔다. 하다못해 사직서도 열정적으로 썼다. 애인이 글을 써보라고 했을 땐 엄청 화를 냈다.

“내가 쓰면 누가 실어줘? 무슨 글을 써? 왜 쉽게 말해?”

사실은 나도 쓰고 싶었던 거다.


다음 주에 우연히 사모임에 갔는데 기자 선배가 맞은편에 앉았다. “선배, 글 쓰면 돈 줘요?” 전공이 전자공학이라 내가 쓸 수 있는 건 과학이야기였다. 00신문에 ‘사소한 과학이야기’ 1화가 나갔다. 2011년 4월 1일. 글을 써서 5만원을 벌었다.

여러 가지 생업과 글 싣는 일을 병행해오다 2017년 3월, 지인 소개로 은유 작가의 수업을 들었다. 충격이었다. 글 얘기를 안 하고 사는 얘기를 하는데 학인들이 섬세했다. 당시 까마득한 사다리에 오르는 꿈을 꿨다. 부들부들 떨면서 꼭대기를 올려다보자 은유샘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끌어올려줬다.


2019년, 감응의 글쓰기 반장이 됐다. 그리고 내 책이 두 권 나왔다. 물론 여전히 수입은 적지만 굶더라도 이걸로 글은 나오겠구나 생각한다. 오랫동안 내가 원하는 걸 몰랐고 스스로를 믿지 못했다. 하지만 이젠 글만으로도 먹고 살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쓰고 싶은 얘기가 무척 많다. 아직은 글이 지겨운 적이 없다. 누군가의 일상을 듣고 기록해서 당사자에게 선물하며 행복을 느낀다. 하고자 하는 바를 최선을 다해 하다 죽는 것. 욕먹을 삶은 아니지 않나?



나는 잘릴 싹이 아니었다. 밟힐 풀도 아니었다.

나는 글밥 먹는 나무들이 노니는 산, 작가 심혜진이다.


- 끝




*글에 나오는 ‘망사스타킹’ 사진은 바로 이것

그리고 담주에 개강하는 내 글쓰기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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