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장례식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아주 어릴 적, 검은색 잠수복을 입고 바닷가에서 들어오시던 모습. 그건 마치 꿈같은 기억이긴 하다. 어쩌면 정말 꿈일지도. 할머니가 해변에서 잡아온 작은 게는 달큼하게 무쳐져 곧 저녁 상에 올라왔다.
아궁이에 뜨겁게 불 지펴 오랜만에 도시에서 온 손녀딸의 목욕물을 가마솥에 데워주셨던 것도 기억난다.
할머니의 머리는 허리춤까지 길었다. 군데군데 검은색이 섞인 은빛 가는 머리칼은 은비녀로 곱게 틀어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고모댁에서 계시던 모습. 시골에서 노인네 혼자 사는 건 힘들다며 둘째, 넷째 고모댁을 옮겨가며 지내셨던 것, 가끔 엄마 등에 떠밀려 오빠와 둘이 할머니를 뵈러 고모댁에 가면 고모들은 어린 나에게 늘 아빠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았다. 아직도 그러고 산다니, 너희에게 연락은 한다니- 같은. 어린 내가 대답하기 힘들었던 그런 질문들과 함께.
병원에 입원해서 산소호스를 코에 끼우고 계셨던 것과 대학시절 주소도 없이 무작정 시골로 찾아가 할머니께 인사드리고 왔던 것도 기억난다.
사실, 어릴 적부터 24시간을 부대끼며 정을 나눴던 외할머니와는 달리 친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크게 없다.
그저 할머니는 아픈 가운데에서도 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는 것과 날 보시면 눈가에 주름이 가득할 정도로 미소 지으셨다는 것. 그 정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순간 멍해졌다.
시골집 마루 한편에 미동도 없이 앉아 떠나는 우리의 뒷모습만 우두커니 바라보셨던 할머니. 그것이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되어버릴 줄이야.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미 숨이 없는 할머니를 발견한 사람은 평일 오전에 방문한다던 사회복지사였다.
꼿꼿하던 시골의 마님은 마지막 남은 집 한 칸에서 그렇게 홀로 쓸쓸히 가셨다..
남편과 나는 급하게 채비를 한 뒤 엄마를 모시고 시골 장례식장으로 내려갔다.
큰 아빠는 베트남 참전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췌장암을 앓다가 몇 해 전 돌아가셨고 그 아래로 고모가 네 분 계셨다.
상주는 아빠였지만. 우습게도 아무도 아빠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자연스레 오빠가 상주가 되었다.
장례식장은 썰렁했다. 제일 먼저 도착한 남편 회사의 조화를 보며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 와중에도 나는 친가 식구들에게 ‘내 엄마가 이렇게 우리를 잘 키웠다’며 으스대고 싶었나 보다. 감사하게도 내 회사에서는 식기와 일회용품 등의 장례용품 일체를 보내주셨다. 누구라도 알만한 대기업 마크가 찍힌 종이컵과 국그릇을 보며 친가 식구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난 그것에서조차 내 엄마의 희생과 노고가 빛나기를 바랐던 것일지도. 덧붙여 여기에- 내가 나고 자라고 공부하고 취직해서 결혼하기까지 아빠의 조력은 1도 없었다는 사실까지.
며칠 전 엄마가 할머니를 찾아뵀다는 이야기는 고모들도 알고 계셨다. 90을 바라보던 사연 많은 노인의 마지막 만남은 아이러니하게 딸도 아들도 아닌 아들의 전 부인. 그래서 ‘전 며느리’ 임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장례식장에서 당당하게(?) 자부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새벽 즈음 친척 어르신 중 한 분이 아빠에게 연락이 되었노라 말씀하셨고 아빠는 다음날 점심 즈음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다른 여자와 함께.
엄마가 빈소를 지키고 있다는 것과,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만난 이가 엄마라는 사실을 듣고 아빠는 차마 그 여자를 빈소까지 데려올 수 없었나 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아빠가 - 그래도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사람 노릇 좀 하려나보다 라는 헛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사실 아빠는 동태를 좀 살펴본 뒤에 여자를 데려오려고 했나 보다.
고모부가 오빠와 나를 따로 불러서 아빠와의 자리를 마련했다. 나의 결혼 소식도 장례식장에 도착해 사위의 인사를 받고서야 알게 된 아빠가- 뒤늦게 묵은 사과라도 하려나 싶었다.
고모부는 아빠를 대신해서 우리에게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얘들아, 너희도 이제 결혼을 했으니 아빠를 이해해 줄 수 있지 않겠니? 아빠는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 이제 새로운 가정을 만들었고...”
아빠가 그 여자와 혼인신고를 했다는 것.
그 여자는 지금 주차장 차 안에서 아빠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엄마를 서울로 보내고 그 여자가 빈소를 지켜야 한다는 것.
아빠를 대신한 고모부의 이야기였다.
오빠는 바보같이 듣고만 있었다. 대체 왜?
피가 거꾸로 솟는 게 바로 이런 기분 이리라.
빈소를 지키고 있는 내 엄마를 생각하니, 생전 소리라곤 내지도 않고 찍소리 못하며 어른들께 공손했던 나에게서 악에 받친 비명이 나오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제일 어린 나는 악을 질렀다. 복도가 떠나가도록.
옆 빈소 사람들이 나와서 웅성거릴 정도로 욕을 하며 악을 쓰는데도 아무도 나를 말리지 않았다.
고모부는 아무 말이 없었고,
오빠는 사실 좀 놀란 것 같았고(지금 생각해보면, 발악하는 나를 처음 봤을 테니),
아빠는 고개를 숙였다.
혼인신고를 했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남편을 옆에 태우고 장례식장 근처에 있는 주민센터에 가서 가족관계 증명서를 발급받았다.
내 아빠의 배우자 란에 적혀있는 낯익은 그 여자의 이름.
이유는 모르겠다. 허탈했다.
그때 내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아빠에 대한 미련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던 건가.
왜 허탈한 마음이 들었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아빠는 조용히 빈소에서 손님들을 맞았다.
처음 보는 딸의 남편을 불러서는,
본인이 외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데 그게 잘 되고 있으니 곧 내가 도움(?)을 주겠다고 했단다.
아빠는 달라진 게 없었다.
저녁에 서울에서 내려오신 시아버지와 빈소에서 맞절을 하는데,
"안녕하세요, 제가 외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어서 이제야 뵙습니다."
라고 인사했단다.
하지만 시아버지는 그저 친척 어른 중 한 분인 줄 아신 것 같다.
우리와 인사를 하고 아버님은 금세 서울로 올라가셨다.
상주인 아빠가 빈소를 지키는 동안 엄마는 안쪽 침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간 일하던 것도 다 정리하고 오빠의 아이를 봐주는 엄마에게 가끔씩 전화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는지)
"야 너는 그렇게 지금까지 애들 옆에서 애들 등골 휘게 하니까 마음이 편하냐?"
"야 너는 좋겠다 애들이 주는 돈으로 먹고사니까"
"내가 요즘 사업이 잘되고 있어, 그래도 너한테 줄 돈은 없어"
라고 엄마의 마음을 휘저어놨던 전남편의 얼굴을 1초도 보고 싶지 않았을 테다.
가끔 근무시간에 뜬금없는 엄마의 전화가 올 때면 그건 늘 울음 섞인 엄마의 목소리였다.
- 오빠랑 싸웠든지
- 아빠의 전화를 받았든지
아빠는 어른들과 가끔씩 이야기를 나누며 빈소를 지켰고 나는 늦은 밤 빈소 옆에 딸린 침실에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 발인 날 아침,
아빠는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