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그의 이야기
나의 아버지 금성은 1955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다.
부농 지주 집안에서 2남 5녀 중 막내로 태어난 금성은 어릴 적 전염병이 마을을 휩쓸었을 때 유일하게 살아난 사내아이라고 했다. 내 조부의 넉넉한 마음씨 덕에 마을 사람들은 땅을 받아 농사를 지었고- 말하자면 소위 '소작'같은 것인데 땅주인과 소작농 관계가 아닌, 사람들에게 대가 없이 땅을 나눠주다시피 하여 아버지의 집안은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나보다 다섯 살 많은 오빠는 어릴 적 시골에 가면 마을 사람들에게 '도련님'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사실 나는 어른들께 말로만 들어 믿지는 않았다. 조선시대도 아니고, 아무리 70년대라 하지만 '도련님'이라니.
그랬던 내가 대학생 때 할머니를 뵈러 무작정 시골에 간 적이 있었는데 할머니 댁을 못 찾아 전화로 고모께 할머니 댁 찾는 법을 여쭤보니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박 귀녀 댁을 물어봐라"는 황당한 대답이 돌아왔다. 드넓은 논과 밭 사이로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는데 할머니 이름 석자 하나 가지고 집을 찾을 수 있다니, 어이가 없었지만 속는 셈 치고 십여분을 기다려 지나가는 할머니 한 분을 붙잡고 여쭤보았다.
- 박 귀녀 할머니 댁을 찾아가려고 하는데요.
생전 처음 보는 낯선 할머니는 굽은 등을 천천히 펴시더니 나를 보고는 물으셨다.
"누구 딸인가?"
- 아, 저요? 저희 아버지요? 성함은...
"아 자네 금성이 딸인가? 손녀딸이 할머니 찾아왔구먼"
하시며 할머니 댁을 알려주셨다.
어이가 없으면서도 피식 실소가 흘러나왔다. 아무나 붙잡고 할머니 성함 석자만 말해도 집을 찾을 수 있다는 고모의 말은 진짜였다.
무튼 그렇게 부와 명예가 있던 집안의 막내아들로 자란 금성은 대학 입학 후 상경했다.
당시 나이차가 많이 나던 둘째 누님이 북한산 공원 안에서 산장을 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금성은 거기서 공부를 하고 있었던 듯하다. 무슨 공부였는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금성은 누나의 산장에서 공부를 하던 중에 친구들과 산으로 놀러 나온 한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짐작은 가지만) 자신이 K대를 휴학했고 현재 고시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라 거짓말을 했다. 그는 얼마 후 여자와 결혼했고 곧 사내아이를 낳았다.
사실 서울의 어느 전문대학에서 전기를 공부했던 금성은 결혼 후 처가의 장인어른 밑에서 전기 기술자로 일을 했다. 장인은 평판이 좋았다. 평판만큼 사람도 좋았다. 하지만 그만큼 수금은 안됐고 금성은 늘 장인어른이 답답했다.
한창 우리나라가 건설로 외화를 벌어들이는 시기인 1980년대, 금성은 H건설에 입사하여 둘째 아이가 태어날 무렵 사우디 아라비아로 건너가 일을 하게 된다.
금성의 아내는 한 해 중 낮이 가장 긴 날, 남편 없이 둘째 아이를 출산했다.
남편이 해외에서 보낸 돈을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은 아내는 그가 보낸 돈으로 인천에 작은 아파트를 마련했다. 언덕 위 5층짜리 작은 아파트. 빨간색 연탄보일러를 때는 나무 마루 집이었다.
금성이 한국에 돌아온 뒤 그는 이내 모든 가산을 정리해 작은 전기공사 가게를 열었다. 모자란 돈은 고향의 땅을 팔아 그의 어머니가 마련해주셨다. 작은 주방과 방이 딸린 동네 조그마한 가게였지만 사업은 꽤 괜찮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그가 고용한 인부의 사망사고가 발생했고, 그는 다시, 이라크로 떠났다.
아내와 두 아이들은 처가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그는 매 해 크리스마스마다 아이들에게 금박의 글씨가 인쇄되어있는, 가끔은 멜로디가 나오는 성탄카드를 한국으로 보냈다.
뜨거운 날씨, 황금빛의 사막. 속눈썹이 긴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낙타 앞에서 허리춤에 양 손을 올린 채 미소를 띤 그의 얼굴을, 아내와 아이들은 한국에서 사진으로 받아 볼 수 있었다.
이라크의 일이 마무리될 즈음 필리핀에서도 잠시 머물렀다.
필리핀에 있는 동안에 그는 현지 한인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미국의 아펜젤러 선교사가 한국 땅에 발을 딛었던 그 시절부터 대대로 기독교인이었던 아내는 감격했다. 드디어 남편이 교인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금성은 필리핀에서 어떤 여자를 만났다.
어른 한 명이 들어가고도 남을만한 커다란 박스가 네 개. 그 많은 짐을 가지고 금성은 한국에 완전히 돌아왔다.
집에 가끔 영어로 금성의 행방을 묻는 낯선 여자의 전화가 왔지만 금성은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집에 없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한국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다 보니 마음에 '내 사업'에 대한 불이 다시 한번 일었다.
그는 주변인들에게서 최대한 돈을 빌리고 재산을 털어 당시 한국에 붐이 일기 시작한 노래방 사업을 시작했다. 이번에도 모자란 돈은 어머니가 땅을 팔아 마련해주셨다.
사실 처음엔 단란주점을 하고 싶었으나 아내가 극구 말리는 탓에 노래방을 개업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아내는 아무래도 여자 도우미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던 것 같다.
남편이 해외로 떠나고 아이들과 친정으로 들어가 살던 시절부터 일을 시작했던 아내는 본인의 일도 다 그만둔 뒤 남편의 사업을 돕기 시작했다.
낮에 시작해 새벽에 끝나는 노래방.
아내는 항상 가게에 있었고 그동안 금성은 또 다른 사업을 구상했다.
돈을 더 많이 빌렸다.
사업을 위한 사람들과의 만남이 많아졌다.
그리고 다른 여자를 알게 되었고, 집에 들어가지 않는 날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거의 집에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그가 벌린 모든 사업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빚은 은행에서 공식적으로 빌린 것이 아니었으므로 갚을 의무가 (법적으로) 없었다. 전화는 받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돈을 빌려줬던 지인들은 그나마 연락이 되는 금성의 아내를 찾아가 돈을 돌려달라고 독촉했다.
둘째 아이가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 금성은 아내와 이혼을 했고, 다른 여자와 살기 시작했다.
그가 가진 기술로 어디에서든 일을 하면 월급을 잘 받았다.
그러던 중 많은 돈이 필요했다.
어디선가 불법체류자와 혼인신고를 하면 돈을 많이 받는다고 했다. 실제로 결혼을 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알지 못하는 여자와 혼인신고를 했다.
하지만 약속한 돈은 받지 못했고 그는 법원에 혼인 무효를 신청했다. 결과는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그러다 알게 된 한 여자와 오랫동안 같이 살았다.
부산 출신의 그 여자는 살가웠고 금성에게 잘해줬다.
아들이 결혼을 한다고 연락을 했다.
금성은 대충 알겠다고, 지금은 너무 바쁘다고 둘러댔다. 그랬더니 딸이 기어코 자기 할 말과 청첩장을 이메일로 보냈다.
아들의 결혼식 당일, 전화는 꺼두면 그만이었다.
결혼식 후에 누님들은 왜 아들 결혼식에 오지 않았냐고 연락을 했다.
금성은 차마 전화를 꺼놨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아이들이 나에겐 연락을 하지 않았다고 둘러댔다.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그 없이 아이들은 잘 지낼 것이므로.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찾아오셨다.
연세가 드신 뒤로 고향에서 올라와 서울 누님들 집을 전전해오던 어머니는 금성의 집이 어디인지도 알지 못했다. 아마도 누님들이 보낸 듯했다.
함께 살던 여자는 어머니를 문 밖에서 내쫓았다.
어머니는 쌀쌀한 가을날, 금성의 집에 발도 들이지 못했다.
금성은 어쩔 수 없었다.
금성이 가진 모든 것은 그 여자의 것이 되어 있었다.
집도, 차도, 월급도.
그리고 일 년 뒤쯤,
금성의 어머니는 돌아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