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학교까지 오가는 길은, 어른이 된 지금 생각해도 꽤 먼 거리였다. 특히나 20kg도 안되는 조그마한 초등학생 어린이가 걸어 다니기엔. 우리 집에서 학교까지는 아파트를 나와 길을 한번, 두 번 건너고, 다시 한참 길을 걸은 뒤 나오는 다른 아파트 단지를 통과해서(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길을 또 한 번 건너야 나오는 그런 복잡한 길이었다. 내 기억이 잘못됐나 싶어 네이버 지도를 켜서 어릴 적 내 통학 길을 찾아보았다. 헐, 어른 걸음으로도 13분. 1킬로 정도 되는 길이네. 대략 15분 정도 걸렸던 것 같은데 잘못된 기억은 아니었나 보다. 아파트 단지를 나서면 바로 학교가 나오는 우리 집 초딩 둘은 복 받았다 정말. 아무튼 국민학교 6년 시절 동안 그 통학 길을, 나는 늘 혼자 다녔다.
다섯 살 차이 나는 오빠가 있어서 초반 한두 달은 오빠랑 함께 등교했던 기억이 얼핏 난다. 물론 내 머릿속 장면은 오빠의 뒤통수만 보일 뿐이지만. 하교 후 친구 몇몇과 운동장에서 놀았던 기억도 있고, 학교 앞 문구점에 들어가 고심 끝에 아폴로나 먹는 테이프, 밭두렁 같은 불량 식품이나 오려서 놀 수 있는 종이인형판을 한두 개 샀던 기억도 있다. 50원짜리 뽑기가 스테이플러에 찍혀 가득 붙어있던 큰 판도 있었는데 앞글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난 운이 좋은 아이는 아니었기에 늘 꽝 아니면 10등이었다. 손가락만 한 설탕 사탕을 받을 수 있었던. 그리고 중간엔 퐁퐁 - 우리 동네의 명칭은 '퐁퐁'이었다 - 타는 곳도 있었다. 300원 내면 15분 뛰게 해 줬던 트램펄린장. 그 앞엔 100원짜리 달고나 뽑기를 파는 아저씨도 계셨다. 그렇게 여러 관문(?)을 통과하고 집에 도착하면 현관문 앞에서 늘 외치곤 했다. "할머니!! 저 왔어요, 문 열어주세요!"
텅 빈 집에 혼자 열쇠로 문 따고 들어가지 않은 게 어딘가 싶다. 문 열어 줄 사람이 있다는 게 감사한 일이라는 걸 안 것은 한참 나중이었지만. 집에는 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계셨기에 열쇠를 들고 다니는 일은 거의 없었고 (심지어 그때는 번호 키를 많이 쓰던 시절도 아니었기에) "안녕히 다녀왔습니다."라는 공손한 인사로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삼시 세끼를 늘 밥과 국과 김치만으로 차려주셨던 할머니께 식간에 먹는 간식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아니, 간식의 존재에 대해 전혀 몰랐던 것 같다. 그저 일흔이 넘어 뇌졸중이 온 할아버지가 담배 대신 시작한 주전부리를 옆에서 같이 했던 정도랄까. 그때 우리 할아버지는 본인이 좋아하는 과자'만' 드셨는데 보통 한 종류가 다른 종류로 바뀌기까지는 최소 일 년이 걸렸던 것 같다. 처음엔 빠다코코넛이라는 과자였고, 그다음엔 죠리퐁, 그다음엔 맛동산 - 우리 모두가 다 아는 바로 그것! - 이었고, 그다음엔 호떡 모양을 한 빵이었다. 각각의 것을 최소 일 년 정도는 먹어야 할아버지의 취향은 바뀌었다. 집에선 밥 아니면 과자. 그게 다였다.
그랬던 내가 '간식'이라는 존재에 대해 알게 된 건, 2학년 정도 되었을 때였나. 같은 반 친구네 집에 처음 놀러 갔을 때였다. 학교가 끝난 뒤 함께 간 친구 집 앞에서 그 아이는 "엄마! 문 열어줘!"를 외쳤다. '아, 엄마가 집에 계실 수도 있구나. 우리 엄마는 늘 집에 없는데?' 처음 '다름'을 느꼈던 것 같다. 친구네 집에 들어가니 그 아이는 자기 방이 있었다. 혼자만 쓰는 책상도 있었다. 친구가 피아노 의자를 하나 갖다 줘서 책상 앞에 나란히 앉아 있으니 곧 그 애 엄마가 커다란 쟁반에 가지런히 깎은 과일과 주스를 예쁜 접시에 담아 갖다 주셨다. "얘들아~ 간식 먹으렴."
그때의 충격이란. 간식을 먹으라고? 간식은 과자 아닌가. 빠다코코낫이나 맛동산 같은 것을 봉지째로 먹는? 그런데 그 간식이 과일과 주스? 집에 '음료수'가 있다니! 놀람의 연속이었다. 집에 엄마가 늘상 있는 것도 신기했는데 그 엄마가 '간식'을 챙겨주셨다? 우리 집에선 교회에서 목사님 대여섯 분이 양복을 갖춰 입고 심방 정도는 오셔야 볼 수 있는 풍경인데. 얘는 늘 이런 대접을 받고 산다고? 그런데 대접이 아니라 일상이었다. 그 친구에게는.
생각해 보니 우산이 없는 하굣길, 비가 오면 나는 가방을 머리에 이고 학교 앞에서부터 저 앞 상가까지. 그리고 상가에서부터 횡단보도 앞 건물 밑까지. 구간 구간을 뛰어 비를 피해 집에 갔던 게 일상이었다. 교문 앞에 우산을 들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엄마들의 모습이 그제야 머릿속에 들어왔다. 누군가에겐 당연하지만, 나에겐 당연하지 않았던 존재. 엄마.
부모님의 사정이야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레 알게 됐지만 어쨌든 내 엄마는 우리 집 생계를 홀로 책임지는 '일하는 엄마'였다. 엄마는 을지로 입구에 있는 전통찻집에서 오래 일하셨는데 그곳은 회사원들이 밀집한 은행 건물이었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그때는 지금과 다르게 토요일까지 근무하는 주 6일제였다는 걸 기억하는지. 지금의 불금과 놀토가 그 시절에는 없었다. 토요일에도 학교를 갔으니 말이다. 일상을 넘어 그야말로 목숨을 바쳐가며 꼭두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는 게 당연한, 워 라벨 따위는 상상도 못 했던 시기였기에 회사마다 공식적으로 쓸 수 있는 간식시간이 있었다! 그런 직장인들의 아침식사부터 간식, 식후 디저트, 회식 후 해장까지 책임졌던 곳이 우리 엄마의 찻집이었다. 엄마는 인천 집에서 아침 7시에 출발해서 밤 10시 반 도착하는, 출퇴근 시간 포함 매일 15시간을 일했다. 다섯 평 남짓한 가게에서 홀로. 아침엔 토스트를 구웠고 점심엔 죽과 팥빙수를 만들었으며 저녁엔 해장에 좋은 시원한 매실차와 칡차를 만들었다.
어린 나에게 '엄마'는 일요일 하루, 그것도 교회를 다녀오고 난 뒤의 반나절만 함께할 수 있는 그런 귀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늘 피곤한 사람이었다. 놀이터에서 다른 어른들이 놀랄 정도인 내 그네 실력을 꼭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었지만 엄마는 집에 있을 때마다 늘 잠을 잤다. 자거나 혹은 빨래를 하거나.
그래서인가 9살부터 나는 인천 - 서울을 혼자 오가며 엄마와의 시간을 찾아 나섰다. 언젠가 엄마와 함께 가게에 갔던 기억을 더듬어, 집에서 나와 마을버스를 탄다. 역에서 내려 1호선 국철을 타고 한 시간 뒤 시청역에서 2호선을 갈아탄다. 혹은 갈아타는 대신 길고 긴 을지로 지하보도를 걷고 또 걷는다. 엄마의 가게가 있는 빌딩으로 연결되는 출구를 지나치지 않으려고 온 기억과 신경을 집중해서. 가끔 헷갈려서 다른 지하상가로 빠지게 되면 아예 밖으로 나갔다. 빌딩 숲 사이에서 엄마 가게가 있는 건물을 눈으로 확인하고 다시 지하도로 들어가 길을 찾았다. 왕복 12차선이 넘는 복잡한 서울 시청 앞에 횡단보도 따위는 없었으므로.
내가 애 엄마가 되고 보니 겨우 아홉 살 된 - 지금 달콤군보다 어린! - 여자아이를 엄마는 무슨 생각으로 혼자 서울에 오게 했을까? 싶었다. 하지만 기억을 더듬어보니, 처음 엄마에게 갔을 때 나는 모든 사실을 비밀로 했다. 집에 계신 할머니껜 "놀이터 가요~" 하며 집을 나섰다. 가는 내내 혼자 가게에 도착한 나를 보고 깜짝 놀랄 엄마의 얼굴을 상상하며 혼자 설레 했다. "짜잔!" 하고 등장. 그리고 정말로- 엄마는 깜짝 놀랐다. 놀라는 정도가 아니라 기절초풍이었을거다. "어머나 세상에, 어머나 세상에"를 외치는 엄마의 모습, 그리고 그 앞에서 헤헤 거리며 웃는 내 모습이 몇 초간의 릴스처럼 머리에 남아있긴 하다. 처음 한 번이 어렵지, 그 뒤로 종종. 아홉 살 때를 시작으로 초, 중, 고를 지나 대학생이 될 때까지 엄마를 놀래는 나의 서프라이즈 방문은 계속됐다.
엄마의 가게에 가면 참 좋았다. 엄마 옆에 있어서 좋았고, 엄마를 계속 볼 수 있어서 좋았고, 엄마랑 수다를 떨 수 있어서 좋았다. 엄마가 가게 바로 옆에 있던 KFC에서 (그 당시 인천엔 롯데리아 정도밖에 없었다.) 비스킷 같은 걸 사주는 것도 좋았고, 버거킹에서 주니어 와퍼 - 뭔가 정말 어린이만을 위한 메뉴 같은 - 를 사주는 것도 좋았다. 그렇게 밤 9시까지 엄마 곁을 지키다가 함께 지하철을 타고 집에 왔다. 운 좋게 붙어있는 두 자리가 나면 엄마의 무릎을 베고 흔들리는 지하철에서 잠자는 것도 좋았다. 난 그렇게 늘 엄마가 그리웠고, 엄마가 좋았다.
그래서 그랬다. 나는 여자니까 언젠가 결혼을 하면 '엄마'가 될 테니, 나는 꼭 그런 엄마가 되어야지. 비가 오면 우산을 들고 교문 앞으로 마중을 나가고, 하교 후엔 맛있는 간식을 예쁘게 담아 주는. 과자도 꼭 그릇에 담아줄 거야. 친구들을 초대해 집에서 생일 파티를 열어주고 자기 전에는 옆에서 잠들 때까지 책도 읽어주는 그런 엄마. 남녀의 역할을 구분 지어서 사회적으로 구속하는 인식이나 고정관념 블라블라 따위를 다 떠나서 순수하게 아이를 낳고 기르는 양육자이자 동반자로서의 '엄마'말이다. 자라면서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지만, 절대로 가질 수 없기에 감히 꿈도 꿀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의 내 엄마. 내 아이에게 그런 엄마가 되어주는 것이 내 꿈이자 로망이었다. 그 로망이 이루어진 지금의 현실을 보자면 좀 많이 동떨어져 있는 그림이긴 하지만.
작년인가, 1, 2학년 전면 등교 덕에 달콤군이 학교에 갔을 때. 드디어-! 오후부터 비가 온 적이 있었다. 비상용 우산이 학교 사물함에 준비되어 있던 터라 굳이 내가 마중 나가지 않아도 됐다. 그런데 곧 빗줄기가 굵어지는 것이 아닌가? 고민 끝에 '장화'를 들고나가기로 했다. 아니 뭐, 학교가 코앞이긴 하지만, (베란다에서 운동장이 보인다) 저렇게 많은 비가 오면 분명히 조심성 없는 아이는 보나 마나 첨벙첨벙 물웅덩이를 골라 밟으며 올 테고, 그러면 냄새나는 젖은 운동화를 빠는 건 결국 내 몫이니까? 얼른 준비를 마치고 설레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상쾌한 비 냄새를 맡으며 기분 좋게 아파트를 나서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마중 나가는, 이토록 설레는 마음을 내 엄마는 한 번도 느끼지 못했겠구나. 가게에 창문 하나 없어 바깥에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 알 수도 없고 휴대폰 또한 없던 시절이니 내 아이가 하교를 잘했는지 밥은 잘 먹었는지 궁금한 마음조차 전할 길 없었겠구나. 그렇게 지금의 나보다 어렸던 엄마의 젊은 시절은 지나갔겠구나.
어쩐 일로 학교 앞에 자신을 데리러 온 나를 보고 반갑게 뛰어오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왠지 마음이 뭉클해졌다. 곧 나에게서 떠날 아들놈인 걸 알고는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