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느님 체험
나병환자였던 아람 왕국의 장군 나아만은
예언자 엘리사가 자신의 병을 고쳐줄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길을 떠났다.
엘리사는 자신을 찾아오는 나아만을 만나보지도 않고
사람을 보내 요르단 강물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한다.
나아만은 기가 찼다.
“나는 당연히 그가 나에게 나와 서서,
주 그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병든 곳 위에 손을 흔들어 이 나병을 고쳐 주려니 생각하였다.
다마스쿠스의 강 아바나와 파르파르는
이스라엘의 어떤 물보다 더 좋지 않으냐?
그렇다면 거기에서 씻어도 깨끗해질 수 있지 않겠느냐?”
화가 난 나아만은
엘리사의 말을 듣지 않고 돌아서 버렸다.
그러자 나아만의 부하들이 그를 말렸다.
“아버님,
만일 이 예언자가 어려운 일을 시켰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아버님께 몸을 씻기만 하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나아만은 부하들의 말을 듣고 마음을 돌려 강물에 몸을 씻었고 나병이 나았다.
<구약성경 열왕기 하권 5장 중에서>
하느님은 이런 분이시다.
우리의 허물은 각자에게 큰 무게로 다가오지만
사실 아버지께서는 용서하지 않으시는 죄가 없는
"사랑 그 자체"이시다.
고해소에 들어가기 위해 긴 시간을 고민하고 가슴 졸이지만
나의 죄를 들은 사제는
'보속으로 주님의 기도 열 번 하세요. '
하고는 사죄경을 외운다.
내가 어떤 무거운 죄 중에 있어도
하느님은 기도문 몇 번으로 퉁~치신다.
아버지는 이런 분이시다.
당신을 만날 길을 최대한 쉽게 만들어 놓으셨다.
- 대구대교구 이상재 가스톨 신부님 강론 중에서-
둘째의 출산을 기다리던 2014년 겨울 어느 날이었다.
아내와 나는 나란히 성당 감실 앞에 앉았다.
한참을 앉아 있다 아내가 내 귀에 조용히 속삭인다.
"할 얘기 다 했는데....?"
나는 그냥 조용히 웃으며 감실을 바라본다.
"그럼 이제 예수님을 봐."
"하고 싶은 얘기 다했다니깐?"
"응. 그래. 이제 아무 말하지 말고 그냥 예수님을 바라봐.
예수님은 아무 말씀 없이도 계속해서 우리를 바라보시잖아."
"뭔가 멋진데, 어렵구나...."
예전엔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찾으려고 많이도 묻고 헤매었다.
기도 중엔 끊임없이 묻고 물었다.
기도는 하느님과 대화하는 것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어찌어찌하여 결론을 얻은 경우도 있었지만
그냥 나 혼자 복잡해진 경우가 더 많았다.
나만의 기도에 하느님이 어떤 방식으로든 응답해 주실 것을 기대하지만
사실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항상 나아만과 같은 실수에 빠진다.
뭔가 특별한 기도를 해야 할 것 같고,
특별한 감동이나 신적 체험이 필요한 것 같고,
가끔은 간절하게 기적을 보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신앙은
무엇인가 초월적이고 특별한 신적 체험을 시켜주시려고 선물로 주신 것이 아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
그것이 본질이다.
그러나 그 본질을 이해하고 나면 그것보다 큰 기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때때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한다'는 표현을 듣게 된다.
이 어마어마한 표현은 많은 신자들을 오히려 좌절시킨다.
나도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할 방법을 찾아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러나 하느님의 대답을 듣기 위해 노력할수록 '하느님은 대체 어디에 계신가!' 하며 지칠 뿐이었다.
헤르만 헤세는 소설 "싯다르타"에서 이렇게 말했다.
"구도자시여. 구도자께서는 너무 지나치게 구하시는 것은 아닌가요? 구하기에 전념한 나머지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 모름지기 누구나 구할 때는 구하는 대상만을 생각하고 목적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답 이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구한다 함은 하나의 목적을 갖는 것이지요. 반면에 발견한다 함은 자유롭게 열려 있는 상태요, 목적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은 일상이다.
우리가 숨쉬고, 먹고, 싸고, 일하고, 돈 벌고, 돈 쓰고, 쉬고, 운동하고, 놀고, 착한 일하고, 나쁜 일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웃고, 울고, 행복하고, 불행하고..... 이런 일상 말이다.
하느님이라는 절대자가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가
온 우주의 모든 시간과 공간에 하느님이 가득하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나와 떨어져 있는 대상일 수가 없다.
"하느님 현존에서 단 한 순간이라도 벗어날 수 있는지 스스로 물어보면 금방 분명해진다."(앙리 르 소)
그러므로 하느님을 대상화하여 그분에게 다가가려고 하면 오히려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하느님은 세상에 너무 당연하게 있는 모든 것이다.
마치 우리가 현재의 시공간을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은 이미 내 안과 밖, 과거와 미래, 온 우주에 충만하시다.
살고 있다는 자체가 하느님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현존은 우리가 기도를 통해 도달해야할 목표가 아니다.
기도는 이미 세상에 충만한 하느님을 발견하고 깨닫는 것이다.
아내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도 기도지만,
말을 꼭 해야만 하는 건 아니야.
혹시 꼭 하느님께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하면 돼.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당신 마음속에 떠오르기도 전에
하느님은 이미 모두 알고 계시거든.
그래서 나는 당신이 하느님을 바라보는 방법을 알길 바라.
하느님이 우릴 어떻게 바라보실지 상상해봐.
상상이 닿는 그 모습처럼 우리도 주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돼."
아이들은 엄마가 시골 성당 사무장이었던 덕분에 성당에서 키우다시피 했다.
아무도 없는 성당에서 뛰어다니고 제대 뒤에서 숨바꼭질 놀이를 했다.
매일 미사에 참여할 수 있었고 성가를 동요처럼 즐겨 불렀다.
수녀님과 신부님을 따라 제의방을 제 방처럼 드나들며
복사단 간식을 마음대로 꺼내먹었다.
남의 아이 같았으면 눈살을 찌푸렸을까?
내 아이라서 그 모습이 어찌나 예뻤는지 모른다.
아! 그렇다면 나보다 더 이 아이들을 사랑하시는 그분은
이 모습을 어떻게 바라보셨을까.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의 눈길은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에 얻어진 본성이다.
하느님이 그렇게 우리를 바라보신다.
우리의 기도는 하느님의 그 사랑 가득한 시선 안에 머물고 있음을 발견하는 일이다.
교회의 전통 속에서 만들어진 아름다운 기도문들은 그 사랑을 더욱 찬란하게 하는 도구들이다.
그 기도문을 읽고 외우는 단순한 행위는 나아만이 몸을 씻었던 행위처럼
하느님의 존재를 우리 곁에 일상화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2.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그대
사람들이 자주 호소하는 기도 생활의 큰 어려움은
따로 시간을 내어야 한다는 점이다.
일상 기도가 실제로 몇 분 걸리지 않지만
그 마저도 규칙적인 시간을 정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잘 하지 않게된다.
그러다보면 기도는 점점 부담이 되고 짐이 된다.
이러면 이제 기도는 축복이 아니다.
묵주를 손에 들고도 기도 시간이 몇 분 후에 끝날 지 시계를 들여다 본다.
이런 습관이 쌓이면 최소한의 의무사항인 주일미사에 참여하는 것만으로 내 할 일은 다 했다며 안주하려는 심리에 빠지게 된다.
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와 만나는 시간을 이렇게 지루하게 여긴다면 얼마나 슬플까!
그렇지만 이것은 하느님의 잘못도 아니고 기도하는 이의 잘못도 아니다.
기도에 대한 잘못된 이해의 문제다.(어떤 면에서는 교육과 습관의 문제이기도 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정화를 위해 명상에 시간을 투자한다.
명상에 시간을 투자하는 사람들은 순수하게 자발적이다.
그들 각자 마음을 다스려야 할 필요가 절실하기 때문이다.
명상이 자주 계속된다는 것은 그가 만족했다는 뜻이다.
명상 후에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는 뜻이다.
우리의 기도는 이러한 기대에서 시작해야 한다.
하느님은 세상을 사랑하시는 분이다.
부모가 자녀를 그리워하듯,
사랑하는 연인이 서로를 그리워하듯
언제 연락해도 따뜻하게 맞아주고 안아주는 가장 좋은 친구처럼
하느님과 우리의 만남은 그런 것이다.
행복한 만남은 헤어짐이 아쉽다.
5분 만 더 함께 있자, 5분 만 더..
그런 만남은 몇 시간이 얼마나 짧게 느껴지는가.
기도는 이런 만남을 갖고 싶은 약간의 이기심으로 해도 아무 상관없다.
하느님은 그런 분이 아닌가.
나는 내 자녀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해진다.
걸어 갈 때도, 앉아 있을 때도, 누워 있을 때도 사랑으로 충만해진다.
하느님도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분은 언제라도 우리를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계신다.
너무나 든든하고 언제나 기대고 싶은 분.
바다보다 넓고 태산보다 크며 언제든지 불러 볼 수 있는 우리의 후견자이고 위로자이다.
귀찮거나 지루하다는 느낌을 이겨내고 억지로 기도를 하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나의 희생 공로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자.
그리스도인에게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는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말과 같은 의미다.
사랑하는 관계에서 내가 싫어도 억지로 하는 일이 공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상대는 나에게 빚을 지게 된다.
기도는 내가 노력해서 쌓는 선업 같은 것이 아니다.
그 자체로 사랑의 표현이고 아낌없이 주는 나 자신이다.
억지로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 때면 차라리 방법을 바꾸는 게 더 낫다.
다른 기도를 한다거나
생각을 비우고 가만히 성당에 앉아 있거나
감실 앞에서 하고 싶은 말을 후련하게 한다거나
사제를 찾아가서 면담과 고해성사를 청하거나
편하게 하느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친구를 만나거나
고요한 곳에서 십자고상을 앞에 놓고 멍때리거나
하느님 이야기를 하는 책을 읽어도 좋다.
어느 수사가 수도원장에게 물었다.
"기도 중에 담배를 피워도 됩니까?"
아빠스는 기분이 살짝 얺짢아졌다.
무슨 이런 어처구니 없는 질문을 한단 말인가?
"당연히 안 됩니다."
며칠 후 그 수사가 다시 아빠스께 물었다.
"그럼 담배를 피우는 중에 기도해도 됩니까?"
어떤 형식과 어떤 대화의 흐름을 중요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기도는 하느님과 마주 한 상태이다.
하느님께서 나를 바라 보신다는 것을 의식하면
그때부터 나의 모든 것이 기도의 일부가 된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바라보실 수 있도록 여러분 자신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조금 지루할 수도 있고 졸릴 수도 있습니다. 졸리면 그냥 졸면 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바라보고 계시니 아무 상관 없습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13)
그렇게
사랑의 근원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바라보신다.
하느님의 눈길이 당신에게 머물러 있다.
그것을 느끼면 된다.
그때부터 삶의 모든 순간이 하느님을 바라보게 된다.
이제 기도는 하느님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표현이다.
당신께서 저를 바라보십니다.
저도.... 당신을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