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과 채찍으로 사람에게 동기를 부여할 수 있을까
토마스 홉스는 "인간은 천성적으로 탐욕스럽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의 행동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당근이나 채찍을 이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인간 본성에 관하여 성악설이냐 성선설이냐의 논쟁은 철학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숙제다. 답이 무엇이든 간에, 만일 홉스의 말대로 인간 본성이 탐욕스럽기 때문에 적절한 당근과 강압적인 채찍만으로 사람들의 행위에 동기를 부여할 수 있다면 인간 사회의 관계문제는 매우 단순한 주제가 될 것이다. 적절히 상이나 칭찬을 해주고, 적절히 벌이나 규제를 하면 된다.
미국의 경영학자 프레드릭 윈슬로 테일러(Frederick Winslow Taylor 1856-1915)는 홉스의 '성악설'을 충실히 수용한 사람이었다. 테일러는 노동자들의 태업 또는 파업이 효율적인 경영기법의 부재 때문이라고 보았다. 테일러의 효율적 경영기법이란, 노동자들이 과업을 달성하도록 자극하는 '차별적인 임금' 지급이다. 즉, 노동자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많은 임금이기 때문에 실적만큼 돈을 주면 열심히 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의 경영기법은 효과가 있었다.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발상이었고 실제로 생산 효율도 좋아졌기 때문에 많은 기업이 채택하였다. 그러나 노동자를 단지 최대의 생산성을 목표로 하는 기계적인 존재로 보았다는 점, 노동자들의 효율이 떨어지거나 파업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을 천성적인 악습으로 이해했다는 점, 당근과 채찍으로 업무를 채근하거나 그것이 싫으면 그만두라고 하는 비인간적 방식이었다는 점 등의 이유로 논란이 되었다.
당근과 채찍 이론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경제 이념에도 충실히 반영되었다. 자본주의는 당근으로, 공산주의는 채찍으로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경영적 관점이 교육으로도 이어졌다. 그리하여 세계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경제체제로 양분되고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자본주의가 대세가 되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시스템은 변하였을지 모르나 인간이 본성적으로 탐욕적이고 게으르다고 보는 입장은 시나브로 뿌리 깊은 고정관념이 되었다. 최근 '워라벨'이나 '욜로' 같은 생활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등장한 것은 어쩌면 당근과 채찍으로 사람이 동기를 얻을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발 일지도 모르겠다. 이 세대는 배고파 보지 않았기 때문에 배부른 소리를 하는 것일까? 전쟁과 대공황이 이어진 '배고픈' 시대를 겪은 부모, 조부모 세대에게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여유 있는 재정은 그 자체로 심리적 안정을 주는 동기였다. 그 동기는 더 많은 돈에 대한 이기적 욕망이 아니라 가족의 부양과 사랑이라는 고차원적 목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단지 당근이 동기였던 것은 아니다.
홉스의 주장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누구나 당근을 좋아하고 채찍을 싫어하지 않나. 생각해보면 별로 특별한 발견도 아니고,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뭔가 기분 나쁘고 불편하다.
신경과학은 인간의 뇌를 역할에 따라 세 영역으로 구분한다. 생존과 항상성 유지를 담당하는 파충류의 뇌(뇌간, 소뇌. 생명의 뇌라고도 부른다.), 기억과 감정 등을 담당하는 포유류의 뇌(또는 대뇌변연계), 인식과 판단, 분석, 직관 등의 고차원적 사고를 담당하는 대뇌겉질(신피질)이 그것이다. 생명의 뇌에게 선이란 안정적인 생명유지 컨디션이고 악이란 생명과 건강 상의 위협이다. 포유류의 뇌에게 선이란 안정적인 심리와 긍정적 감정들이고 악이란 고통과 두려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다. 대뇌겉질에게 선과 악은 고차원적이고 철학적인 영역이 된다. 인간의 행위 동기를 당근과 채찍으로 부여할 수 있다는 주장이 불편한 이유는 성악설인지 성선설인지 때문이 아니라 인간을 파충류의 뇌와 포유류의 뇌 수준으로만 바라보기 때문이지 싶다. 홉스에게 강한 동의를 하는 사람들도 본인을 짐승 취급하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그러하다.'라고 하면서도 무의식 중에 '나 빼고'라는 단서를 붙인다.
아무튼 이러저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금전적인 이익이 사람을 움직이는 동기라고 보는 입장은 지금까지도 세상의 주류를 이루는 것 같다. 이렇게 외부의 자극이나 보상에 의해 행동이 일어난다는 원리를 주장하는 심리학적 이론을 행동주의라고 한다.
선을 추구하는 본성
홉스 때문에 나는 마음이 불편하다. 인간 본성이 악하다고 생각하는 관점을 뒤흔들어주는 이론이 있으면 좋겠다. 확증편향의 본성 때문인지 몰라도 이 불편한 마음을 위로해 줄 성선설 류의 주장을 보고 싶다. 나와 비슷한 생각이 드는 분들에게 뤼트허르 브레흐만의 '휴먼카인드'를 추천한다. 이 책은 시작부터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라고 주장한다. '휴먼카인드'를 읽은 사람들은 정교한 논리와 증거에 설득당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 그러나 반대자들은 말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폭력과 테러와 전쟁 뉴스, 인간의 행위라고 믿기지 않는 잔인한 범죄들이 끊이지 않는데 인간이 원래 선하다고?'
분명히 인간의 본성을 의심할 만한 사건들은 뉴스에 넘쳐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친절함과 배려를 드러내는 인간사의 평범한 대부분 사건들이 말 그대로 사소하고 인기 없는 평범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사의 좋은 소식 대부분은 뉴스거리가 아니다. 반면에 무섭고 자극적인 뉴스는 언론사의 주력 상품이다. 자극적인 뉴스는 잘 팔리는 페이지를 추천하는 인터넷 알고리즘에 따라 사람들에게 더 자주 드러나고 그런 뉴스 때문에 사람들은 부정적인 면을 더 많이 접하게 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브레흐만은 나쁜 뉴스는 오히려 매우 드물고 예외적인 상황이지만 미디어를 통해 폭발적으로 공유되기 때문에 오해가 심각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휴먼카인드'에서 사람들이 쉽게 수긍할 수 있도록 인간이 본성적으로 선하다는 근거를 실증적으로 증명한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다.
사람들이 위기에 빠졌을 때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는가?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재난에 빠뜨렸을 때 언론은 무정부 상태가 되어버린 도시의 상황을 연일 보도했다. 대홍수로 주택 80%가 물에 잠겼고 패닉에 빠진 사람들은 살인과 약탈과 도둑질을 일삼지만 공권력 조차 무기력한 상황이라는 보도들이었다. 문명의 혜택이 소멸되는 상황을 맞이할 때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인 존재로 돌아가게 되는지를 역설한 사람이 앞에서 말한 토마스 홉스였다. 자연 상태로 돌아간 인간은 자기 생존을 위해 오로지 타인과 경쟁하고 싸우는 최악의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이나 코맥 매카시의 '더 로드' 같은 소설에서도 극단적인 위기에 드러나는 인간의 부정적인 본성이 얼마나 무섭고 파괴적인지를 몸서리치게 그려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에서도 사실일까?
물이 빠지고 복구가 시작된 뉴올리언스에서 밝혀진 사실은 뉴스가 보도했던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사망자가 있었지만 살인 사건으로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도둑질이 있었지만 그것은 생존을 위협받은 상태에서 일부 사람들의 행동이었다. 평상시에 일어나는 약탈 범죄의 빈도보다 오히려 크게 감소했다. 총소리로 들렸던 것은 가스탱크의 안전밸브가 뽑히는 소리였다. 우리가 재해를 겪고 실의에 빠졌을 때를 생각해보라.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대구 지하철 화재 때,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911 테러가 일어났을 때. 재난의 가운데 있던 사람들이나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였던가. 사람들이 서로 자기가 먼저 살겠다고 아수라장을 이루었던가? 브레흐만은 생명의 위협을 받는 위기 상황이 되면 처음 보는 옆 사람도 지키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주장한다. 뉴올리언스의 재난 지역에 일어난 사건을 보도한 미디어들의 증언은 왜곡되고 과장되어 있었다. 실제로 그 무서운 재난 속에 있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걸었고 집을 잃은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최악의 상황은 오히려 인간 내면의 최상의 것을 이끌어낸다."
브레흐만은 소설 '파리대왕'의 표류기를 실제로 겪은 사람들을 찾아내어 직접 취재했다. 현실 세계의 사람들은 최악의 상황을 만났을 때 소설과 달리 침착하게 서로 도왔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남은 이들은 평생의 친구가 되었다. 한편, 전쟁에 끌려간 대부분의 병사들은 실제 상황에서 적군이라고 하더라도 자신과 같은 모습을 한 '사람'에게 차마 조준 사격을 하지 못하였는 것이 밝혀졌다. 길에서 낯선 사람이 사고를 당하거나 범죄를 목격하면 방관하지 못하고 작은 도움이라도 주려고 모여든다. 이렇게 브레흐만이 찾아낸 인간 내면의 선한 본성의 증거들은 명백하다.
외부인센티브 편향 : 나는 자발적으로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우리가 성악설에 자주 편향되고 왜곡된 인간의 이미지에 쉽게 넘어가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선한가 악한가의 논의와는 조금 다른 이유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스탠퍼드대학 칩 히스 교수는 같은 대학 법대생들을 대상으로 설문 연구를 실시하였다. 법대생들에게 자신이 공부하는 목적을 물었더니 자신들의 오랜 꿈과 법에 대한 관심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64%였던 반면, 다른 사람도 그렇게 내재적인 동기로 법을 공부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12%에 불과하였다. 자기 행동은 선한 동기로 방향을 선택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내재적 동기에 대한 신뢰는 그만큼 높지 않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칩 히스는 이를 '외부인센티브 편향'이라고 불렀다. 홉스가 인간이 본성적으로 탐욕스럽다고 했던 것도 이같이 타인에 대한 편향된 시선 때문 아니었을까.
시카고 대학 니콜라스 에플리 교수도 비슷한 실험을 했다. 경영학과 학생들에게 직업 선택의 기준을 물었을 때 가치 있고 성취감을 얻게 하며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고 대답하는 학생들이 훨씬 많았다. 그러나 다른 학생들에게는 그것이 중요한 의미가 아닐 것이라고 대답했다. 즉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일의 가치에 관심이 있지만 남들은 단지 돈을 벌려고 그 일을 한다.'
외부인센티브 편향은 인간의 선천적인 결함이라고 할 수 있지만 자연스러운 것이다. 작가 윌 스토는 "심리적으로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자신을 (더) 영웅이라고 생각한다."라고 하였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을 '착각'한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 있는 삶은 고결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좋은 것을 모르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이 꼭 나쁜 의미만은 아니다. 누구나 자기 스스로를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평가한다는 말은 인간은 누구나 선을 추구한다는 말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도덕적 무결을 증명하려 한다. 만일 내가 선을 추구하는데도 타인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면 선이나 도덕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의 차이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는 다양한 신념의 차이로도 이어진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경제를 바라보는 좌우 갈등이 사회정의를 규정하는 상반된 관점이라기 보다는 사건을 초래하는 원인이나 사회적 메커니즘에 대한 '상반된 분석'에서 비롯된다"라고 하였다. 즉, 좌우 이념의 차이는 왜 문제가 발생하였는지 원인을 지적하는 것에 있을 뿐이고(외부인센티브 효과 때문에 우리는 대체로 '너 때문' 또는 '너희 때문'이라고 한다.) 모두의 목적은 결국 똑같이 사람들이 모두 잘 사는 세상이다. 나의 신념이 더 우월하다고 착각하는 본능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각자의 선과 행복을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그와 관련한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그리스 로마시대의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가 똑같이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라는 물음을 던지고도 의견 대립을 이어온 것을 생각해 보라. 이 두 학파의 표면적인 대립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그러므로 선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범위의 차이도 개인적 능력과 살아온 삶의 총화가 얻어내는 분석 또는 종합의 능력의 차이라고 할 것이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은 적어도 비도덕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삶과 능력에 대한 성찰과 상관없는 본성적 차원에서 말이다.
그러므로, '좋은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항상 의견 일치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정상적인 사람들은 누구나 좋은 것을 좋아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나름대로 선한 삶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보편적인 의미의 선은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앞에서 도덕적 우월감이 만드는 서로의 '다름'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도덕적 우월감은 '틀림'을 야기하기도 한다. 도덕적 우월감이라는 착각은 각자의 뇌가 지금까지 살면서 만들어 둔 자신만의 신념에 따른 선의 기준 때문에 일어난다. 그 기준은 인간이 완전한 존재가 아닌 이상 반드시 불완전하다. 사람의 뇌는 선천적으로 그러한 결함의 조건 아래에서 살아간다. 윌 스토는 이렇게 말한다. "지능은 자신의 결점을 찾아내는 데는 효과적이지 않지만 자기가 옳다는 것을 증명할 근거를 찾는 데에는 효과적이다." 즉, 객관적인 진실을 찾기보다는 나와 내 신념을 보호할 수 있는 근거나 주장을 선별하고 선호한다. 이것이 '확증편향'이다. 확증편향은 내 신념을 보호할 수만 있다면 심지어 그것이 황당무계한 것이라도 상관없이 그것만 믿어버린다. 살인이나 폭력 등의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도 자기 행동은 나름 정당한 근거가 있었고 피해자들이 자신을 참을 수 없도록 도발한 것이 사건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도덕적으로 뛰어나다는 착각의 본능을 깨닫고 내 불완전한 생각이 세상의 본 모습과 충돌하지 않는지 살필 능력을 키워야 한다. 그러면 세상의 일원으로서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고 세상과 이웃에 기여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