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서 우러나는 행위

by 마니피캇

엉망인 사람으로 비치고 싶지 않은 본성


브레흐만이 발견한 인간의 선한 본성과 윌 스토가 적절히 표현한 '도덕적 우월성의 착각'은 건강한 삶의 태도를 고민하는 우리에게 어떤 아이디어를 제공하는가. 이 글은 성선설과 성악설의 전통적인 논쟁에 뛰어드는 시도가 아니다. 인간은 복잡한 존재이고 악행은 분명히 실재한다. 인간에게는 선한 면도 있고 그렇지 않은 면도 있다. 최악의 허리케인으로 구조가 시급한 뉴올리언스 내부에서는 이타적인 활동이 평소보다 크게 늘었지만 외부에서 부정적 뉴스의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은 패닉과 무정부 상태라고 알려진 그 지역을 두려워했다. 구조가 필요한 곳이었음에도 제압을 생각했고 그 곳 상황을 두려워한 사람들은 구조대로 자원하기를 꺼렸다. 실제로 투입된 경찰들이 과도한 경계로 무고한 사람들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또한 실체 없는 두려움 때문에 구조가 늦어져서 더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결과가 말하는 것은 간단하다. 타인의 고통을 접하면 정상적인 사람은 누구나 연민을 느낀다. 그러나 타인이 나처럼 선한 의지와 동기를 가지고 있는 지는 의심한다. 나는 착한데 다른 사람들은 믿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외부인센티브 편향은 선한 의지와 마찬가지로 또 하나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뉴올리언스 구조에 투입된 경찰이 잘못된 정보로 인해 이재민을 폭도로 오인하여 사살한 사건은 외부인센티브 편향이 만들어 낸 최악의 상황 중 하나일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도덕적으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주장하면서도 혼자 있을 때나 주변의 눈치를 본 후 비도덕적 행위를 하기도 한다. 또는 평소 이타적인 행위에 소극적인 사람들도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선행을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 중 대부분은 선행의 기회를 만들지 않으며 기회가 오면 다른 핑계로 선행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누군가에게 선행의 기회는 적극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슬쩍 회피한다. 그렇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절대 남 좋은 일은 하지 않겠다' 라고 드러내 놓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 그들도 선행이 좋은 것이라는 말은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용과 노력이 들지 않은 한에서는 그들도 적극적으로 선하며 최소한의 노력으로 자신의 선함이나 도덕성을 주장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최대한 크게 떠벌린다. 즉, 이기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사람들도 선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을 좋아한다. 다만 반드시 누군가 보아주어야 한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도 알고 왼발과 오른발도 알아야 한다. 이런 경우라면 토마스 홉스의 말대로 도덕 기준이 아니라 이익이 되는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이것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필요는 없다. 동기야 어찌되었든 선을 추구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인정하는 태도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브레흐만은 이것을 최소한의 양심과 선을 지향하는 본성의 증거라고 생각한 듯하다. 최악의 악당들도 자신은 나쁘려고 의도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평생 타인의 고통을 돌아보지 않은 이기적인 사람들도 세상의 눈치를 보면서 기회가 있으면 선행을 하겠다고 하는 것은 아무도 적극적으로 나쁜 놈이 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는 증거다.


도덕적 행위의 동기는 자신의 부정적인 모습을 감추려고 하는 본능과도 연결된다. 빅데이터 과학자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의 책 '모두 거짓말을 한다'에 의하면 사람들은 아무에게도 들킬 염려가 없거나 들켜도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경우, 내밀한 욕구와 궁금증을 외부로 표줄한다. 구글 검색 트랜드는 이용자들이 어떤 검색을 했는지를 통계적으로 정리하는데 사람들은 평소에는 수치감 때문에 누구에게도 말하기 어려운 내용도 검색창에는 스스럼없이 질문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비도위츠는 구글에서 '날씨'를 검색한 양과 '포르노'를 검색한 양이 비슷하다는 것을 찾아냈다.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세계 언론은 표면적으로 인종차별주의의 종식을 선언하면서 흥분하였지만 검색 포털의 세계에서는 흑인을 비하하는 단어의 검색이 급증했었다. 선악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내 속마음을 선별적으로 드러낸다.


분명히 우리는 양면적인 존재다. 사람들은 선, 또는 좋은 것을 추구하고 한편으로는 내면의 악이나 일탈을 억누르고 있다. 사람은 선한 본성과 악한 본성을 함께 소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누구나 - 심지어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죄인 조차도 - 본능적으로 선한 모습을 보여주기를 원하고 나쁜 모습을 숨기기를 원한다. 심리학자 로저 투랑조는 어떤 사람도 남으로부터 '엉망인 사람'으로 비춰지길 원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니콜라스 에플리 교수는 우리의 도덕적 우월성에 대한 착각이 강력하고 보편적인 "긍정적 착각"이라고 하였다. 즉, 도덕적 우월감에서 비롯되는 나쁜 모습을 감추려는 노력은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타인의 감정을 살피고 공감능력을 가지려고 노력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내재적 동기


'인간 본성의 법칙'의 저자 로버트 그린은 사람에게 고차원적 자아저차원적 자아가 있다고 말한다. 고차원적 자아는 이성이 지배하는 영역이고 저차원적 자아는 본능이 지배하는 영역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고차원적 자아가 저차원적 자아를 잘 제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저차원적 자아가 더 강력하다. 우리 뇌는 좀 더 쉽게 도파민을 생성하는 방법에 이끌리고 그 보상에 쉽게 굴복한다. 고차원적 자아에게 성취란 이타적인 모습과 겸손하고 절제된 생활, 사건의 숲과 나무를 두루 살피며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의 복잡계를 통찰하여 최선의 전략을 짜는 행위다. 반면에 저차원적 자아는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욕망에 집착하고 타인을 협력자로 보기보다 적대적 경쟁자로 설정한다. 도전이 필요한 현실에서 회피를 선택하고 절제가 필요한 상황에서도 끓어오르는 쾌락의 자아다. 누구나 알고 있다시피 저차원적 자아를 만족시키는 방법이 더 쉽다. '잘 먹고 잘 놀고 잘 싸는' 원초적 본능의 만족이다. 저차원적 자아는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은 제거할 수 없다. 그러나 '제어'할 수 있다. 저차원적 자아를 길들이고 고차원적 자아의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력과 각성이 필요하다."

뤼트허르 브레흐만의 주장처럼 인간이 선함을 선호하는 경향이 더 강하다는 것은 명백한 것 같다.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가 성선설을 주장한 맹자에게 인간이 원래부터 선하다면 교육은 무슨 필요가 있는가라고 반박했다고 한다. 순자의 질문에 감히 이렇게 답하고 싶다. 여기서의 질문과 문제의식은 인간의 '착각하는' 결함이다. 지금까지 이야기 했던 것을 토대로 볼 때 인간은 선악을 구분하고 선을 추구한다. 정상적인 사람 가운데 어느 누구도 악을 추구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착각하는' 결함 때문에 잘못된 선을 추구하기도 한다. 그래서 교육이 필요하다.


나치에 동조하여 유대인 말살에 참여했던 어느 말단 관리는 이렇게 말했다.

'마침 아이의 손을 잡고 온 유대인 엄마가 있었다. 내 옆에 있던 관리가 엄마를 쏘았다. 나는 어차피 아이 혼자서는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아이를 쏘았다.'

그는 이 와중에도 자신의 범죄를 남의 탓으로 돌리려하고 자신의 행동은 어쩔 수 없는 바른 선택이었다고 주장한다. 다른 모든 이가 그를 악마의 하수인이라고 손가락질 할지라도 그 스스로는 정말로 자신이 결코 적극적으로 악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이러한 범죄자들의 변명은 흔히 볼 수 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거나 피해자가 자신을 먼저 자극했기 때문에 사건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상황에서도 자신의 도덕적 우월의식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은 본능적인 착각이고 타고난 결함이다. 그래서 무엇이 선인지 판단 할 능력을 교육해야한다. 행위나 대상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르쳐야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의 선한 본질을 지식으로 발견하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선한 동기를 부여하고 강화하도록 하는 실천적 논의다!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는 행동의 차이를 만든다. 성악설의 관점은 프레드릭 윈슬로 테일러처럼 당근과 채찍으로 인간관계를 이루게 한다. 그러한 관점은 사람들이 스스로 동기를 부여할 줄 모르며,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움직인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질적 풍요가 안정과 여유를 제공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겨우 물질적 보상이나 외부 규제에 굴복하여 살아간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심리학자 에드워드 L. 데시 교수는 '마음의 작동법'에서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경제적 동기라는 행동주의적 주장에 의문을 품었다. 만일 그렇다면 아무 경제적 이득이 없는 등산, 독서, 임신 등의 행위들에 성실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는 오히려 경제적 보상이 행위의 동기를 약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발견하였다. 퍼즐 놀이에서 금전적 보상이 주어지자 사람들이 느끼는 즐거움이 급격히 감소하였다. 단순한 놀이에서도 행동주의적 보상은 내면의 자발적 동기를 깨뜨려 버린다. 월드컵을 보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즐거움과 월드컵 결과를 두고 도박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어떤 의미의 차이가 있는지 생각해보자. 월드컵 그 자체가 만드는 드라마와 스토리는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선물하고 우리 편이라는 의식으로 특별한 정신적 유대감을 형성하기도 한다. 그러나 도박사들은 그런 의미 따위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에드워드 데시의 연구는 큰 생각의 전환을 이끌었다. 외부에서 자극하는 동기보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스스로의 동기부여가 즐거움을 만들 뿐만 아니라 창의성과 책임감을 가진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인에게 어떻게 동기를 '부여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어떻게 스스로 동기를 '일으킬'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실제로 사람들은 내면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스스로 하고 싶은 일과 가고 싶은 길을 찾는다. 아마도 인간들은 각자 나름대로 '사람은 왜 사는가, 나는 누구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삶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프레드릭 테일러의 주장대로 행동주의적 보상, 즉 외적인 동기가 효과적인 곳도 있다. 테일러 시대에 초시계로 노동자들의 생산량을 측정했던 작업처럼 단순 반복 작업이 그러하다. 현대사회에서는 점점 로봇들이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는, 내재적 동기가 생기기 어렵거나 필요없는 작업들이다. 그러나 인간은 본질적으로 내재적 동기가 없이 행동할 수 없는 존재다. 생존을 위한 일이라 할지라도 로봇 취급을 당하거나 자아를 무시 당하는 상황을 견디어 낼 수 없는 존재다. 20세기 초반의 철학자이자 노동운동가였던 시몬 베유는 당시 공장에서 실제로 노동자로 살면서 사유할 겨를을 주지 않는 것이이 가장 끔찍했다고 증언했다. 기계로 취급받는 노동자에게 생각은 사치였다. 생각은 생산을 늦추기 때문에 오직 빠른 손놀림을 익히고 또 그렇게 하는데 집중해야 했다.


사람들의 행동을 이끌어내는 동기가 외적인 것인가 내적인 것인가라는 질문은 너무 사변적인 토론이 될 수 있다. 두 가지 모두 사람들의 행동을 유발하기는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 반대를 물어보려고 노력한다. 외적인 동기로 하는 행동과 내적인 동기로 하는 행동이 어떻게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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