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환경은 점점 더 좋아지고 있습니다. 의견이 분분할 수 있겠으나 국가가 부유해지고 복지가 당연해짐으로써 각 종교나 사회 단체들도 다양한 방향으로 사회복지를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시스템은 취약계층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을 때 유익합니다. 그런 방향이 참 다행스럽다고 생각합니다.
회사에서 가까운 모 복지관에서 '취약계층 밑반찬 배달' 봉사자를 구한다는 공고를 보고 찾아갔습니다. 마침 우리 회사 시스템이 평일 중 하루를 반일 근무하도록 되어있는데 내가 쉬기로 한 화요일 오후가 반찬 배달일과 딱 맞았기 때문입니다. 복지관 담당 직원은 최소 3개월은 해 주셔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마고 대답했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은 독거노인 또는 취약계층 가정에 복지관에서 만든 반찬을 배달하고 불편한 것이 없는지, 복지관에 부탁할 것이 있는지 안부를 묻는 일입니다.
보통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가장 큰 괴로움은 외로움입니다. 15~16년 전 쯤 대구 일심재활원 입구에 적혀있던 문구가 어렴풋이 기억납니다. 마음에 새길만한 글이라서 어딘가 메모를 해 두었었는데 잃어버렸습니다. 기억으로 대충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재활원의 친구들은 일주일에 한 번 오시는 봉사자 여러분들을 일주일 내내 오매불망 기다립니다.' 참고로 실제 거기 적혀있던 글은 아마도 그때 당시 일심재활원 원장 신부님이 쓰신 글이었는데, 시적이고 아름답고 감동적인 문장이었습니다. 저렇게 대충 쓴 글이 아니었어요. 아무튼 중요한 메시지는 '친구들의 기다림'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신부님이 우리에게 했던 부탁은 '무엇인가 하러 온다고 생각하지말고 친구가 되어준다고 생각하고 왔으면 좋겠다.'였습니다. 아프리카 톤즈의 고 이태석 신부님의 책 제목이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였던 것도 같은 맥락의 부탁이었을 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은 이태석 신부님을 닮은 사람이 되고 싶은데 막상 무엇을 해 보려고 하면 첫발을 내딛기가 어렵습니다. 복지시설 같은 곳에 봉사활동을 가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이해할 겁니다. 우선 어떤 방법으로, 어디를 가야 동참할 수 있는지 막연하고 그 첫 만남의 어색함과 내 공간을 찾지 못해 허둥댈 것 같은 걱정이 앞섭니다. 조금 격려가 될 지 모르겠지만, 이태석 신부님도 처음에 아프리카에 갔던 일을 회상하면서 같은 경험을 고백했습니다. "처음에는 원래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나도 일주일 동안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보고만 있었다."(이태석,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활동의 크고 작음을 떠나서 자원 봉사를 하러 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느끼지 않을까요. 그런 걱정과 뻘쭘함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한다는 활동 그자체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라는 것을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인지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와든 첫만남이 어색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첫만남이 어색하지 않다면 오히려 이상합니다. 어색한 마음은 '친구'라는 단어에 집중하면 조금 편안해 지는것 같습니다. 새로운 학교에 갔을 때, 새로운 회사에 갔을 때, 새로운 모임에 갔을 때 우리가 느끼는 그런 뻘쭘함이 자원 봉사의 첫날에 느끼는 뻘쭘함과 다른 것이 아닐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서 가까워지고 친구가 되면 자연히 해결이 됩니다.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이라면 봉사라는 의미는 점점 옅어집니다. 봉사라는 의미는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지는 것이 옳습니다. 친구에게는 우정과 사랑으로 가는 것이지 어느 한편이 일방적으로 봉사하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친구에게 예의가 아닐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감정적 혹사입니다. 타인을 위해 희생을 하게 되더라도 우정과 사랑 때문에,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처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의 행위가 삶과 인격으로 녹아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봉사활동이든 우정이든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고통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친구는 서로의 곁에 있다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존재이지, 한쪽이 무엇을 주기 때문에 의미있는 흥정의 관계가 아닙니다. 즉, 내가 그에게 의미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자원봉사의 목적으로 삼고 있는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 이 일의 목적이고 가치입니다.
우리 뇌는 근본적으로 관심에 목말라 있어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하는 봉사 행위라는 건 애초에 없습니다. 누구든지 내 행위에 관심을 가져주고 좋은 평가를 해주기를 바랍니다. 내가 이런 글을 쓰는 것도 내 무의식에 그런 의도가 깔려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런 행위가 순수하게 친구가 되는 과정이라고 정화하는 데에는 어떤 깨달음의 단계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선한 행위를 보상받고 싶어하는 감정을 지워버리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혹시 내 선행을 반기지 않는 상대방을 만나면 '내가 좋은 마음으로 만나러 왔는데 이 사람은 나에게 그렇게 고마워하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가 나에게 도움을 원한 적도 없는데 말입니다.
과거에는 어떤 의무감 같은 것이 끓어올랐던 적이 있습니다. 스스로 그렇다고 인정한 적은 없지만 크리스찬으로서,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강박으로, 나의 고고한 가치관을 인정받고 싶어서 등등이었을 테지요. 얼마 전 가톨릭 사제인 오래된 친구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친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전부터 말해주고 싶었다. 그 의무감 때문에 본질적인 것을 놓치고 산 것은 아니니? 예전에 넌 정말 행복해 보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런 의무감에 휩싸여서 전투적으로 살기 시작하더라. 그 이후로는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았어. 지금은 마음이 어떠니?"
"아, 배신부! 그 말이 맞아."
아마도 이 글에서 제 과거에 대한 여러가지 고백을 해야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관심이 없어도 맥락이 필요하니까요.
제가 만나는 분들 가운데 밥을 굶거나 추위에 떨어서 고통받는 분들은 다행히 없습니다. 그렇다고 경제적 불편함이 없는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최소한의 생존 조건은 어떤 방식으로든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글 첫머리에 우리나라의 복지정책이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덕분에 이제 우리는 좀 더 인간다운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외로움과 만남과 기쁨에 대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