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냄새나 지린내를 좋아하는 사람이야 있을리 없겠지만(확실하지는 않다.) 난 좀 유난스러운 것 같다.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냄새가 그와 대화할 때의 물리적 거리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독거노인들을 방문할 때 대문을 열 때마다 훅 뿜어져 나오는 냄새는 대체로 숨을 참고 싶은 가난의 냄새다. 마음 속으로 내 본능을 꾸짖고 호흡을 최대한 짧게 끊으면서 꾸역꾸역 들어간다. 들어오라고 하지 않으면 집 앞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때때로 긴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짧은 안부와 인사만 나누고 돌아나오기도 한다. 고백하건대 냄새가 고역이고 그 냄새를 고역이라고 느끼는 내 모습은 마음의 고역이다. 이런 본능적 반응이 부끄럽다. 그냥 본능일 뿐일까? 정말 내 의지가 개입하지 않은걸까?
대학생 때 일과를 끝내고 기숙사 방으로 돌아왔을 때 내 방에서 느껴지는 아재 냄새가 싫어서 그 좁은 방에 각종 방향제를 몇 개씩이나 두곤 했었드랬다. 동기들은 오히려 그 방향제가 더 고역이라며 놀리기도 했었지만
나는 사람 몸이 만들어내는 땀내와 코린내가 너무 싫었다.
냄새에 예민해진 이유로 짐작되는 몇가지가 있다. 일곱 살 때였지 싶다. 햇빛이 잘 들지 않는 집에 사는 동네 친구네에 갔었다가 쿰쿰한 곰팡이 냄새를 맡은 후부터 그 친구와 점점 멀어졌던 적이 있었다. 그 어린 마음이 내 가장 솔직하고 본성적인 반응이었을까. 사실은 우리집에도 그런 냄새가 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냄새와 상관없는 척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어린 시절의 우리집과 나에게도 냄새가 났다. 할머니는 자주 방에서 메주를 띄우거나 고추를 말렸다. 보일러를 설치하고 온수를 편하게 사용하기 전까지는 매일 샤워를 하지도 못했으니 아이들도 어른들도 몸에서 냄새가 났을 것이다. 그래서 집은 청소를 아무리 해도 설명하기 어려운 특유의 가난한 냄새가 배어 있었다. 어머니는 예민한 나 때문에 늘 섬유유연제를 사용하여 옷을 세탁하거나 햇빛에 뽀송하게 말려주셨지만 섬유유연제 분자들은 하루도 견디지 못하고 메주 냄새나 반찬 냄새 분자들에게 패배하여 사라졌다. 사춘기 시절 나에게 그런 냄새들은 큰 스트레스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표 된장찌개는 그립지만)
사실 우리집도 가난하고 좁은 집이었다. 방 두 개짜리 18평 아파트에 다섯 식구가 살았다. 할머니와 나와 동생이 한 방에서 지냈기 때문에 콤콤한 할머니 냄새가 늘 내 옷에 배어 있었다. 할머니 냄새가 싫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서 냄새가 난다고 할까봐 신경이 쓰였다. 그나마 집에 햇빛이 잘 들어서 곰팡이는 적었지만 나에게서 다른 불쾌한 냄새가 날까봐 늘 두려워했던 것 같다. 그런 냄새는 우리집의 가난을 폭로하는 자비없는 뉴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 기생충에서 배우 이선균이 가난한 사람들이 풍기는 특유의 냄새를 언급하는 장면은 내 기억 속의 많은 생각들을 강제 소환했다. 가만히 두었을 때, 사람이 풍기는 자연적인 냄새는 역설적이게도 땀과 노폐물이 썩은 내다. 그것이 정말로 향기롭지 않은 것인지, 우리 뇌가 향기롭지 않다고 규정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누구도 자연 상태에서 아름다운 꽃향기나 매혹적인 화학적 향기를 뿜어내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냄새를 숨기기 위해 향기 좋은 화장품을 쓰고 섬유유연제로 옷을 세탁하고 그 위에 오래 지속되는 강렬한 향수를 뿌린다. 결국 돈이 물리적 냄새를 만든다. 햇빛이 잘 들지 않거나 결로가 잦은 집에 살면 습기 때문에 곰팡이 냄새를 풍기게 되고 환기가 잘 되지 않거나 공간 분리가 되지 않는 좁은 집에는 구석구석에 음식냄새가 밴다. 그 고약한 가난의 냄새는 마치 굴레처럼 사람을 따라다닌다. 아무리 섬유유연제로 빨래를 하고 화학 물질로 가려보려해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가난의 냄새는 분노와 연민을 동시에 일으킨다. 가난에 분노하고 가난한 냄새의 주인에게 연민을 느낀다.
사랑의 척도는 '상대의 가장 고약한 냄새도 사랑할 수 있는가.' 라고 했던가. 평소 냄새에 민감한 나도 정말 내 자식들의 똥 오줌을 치울 때는 전혀 싫음을 느끼지 못했다. 젖먹이 아기의 똥은 실제로 냄새가 덜 고약하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사랑과 냄새의 함수 공식에 동의한다. 냄새가 아무리 고약해도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낸 냄새 때문에 역한 느낌을 받지는 않는다. 혹시 역한 느낌은 받더라도 괴로움으로 인식하지는 않는다. 사랑하는 마음이라면 그렇다.
어느 날 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 거지 한 사람이 찾아왔다. 거지는 다짜고짜 프란치스코의 방으로 들어서면서 말했다.
- 밖이 너무 추워서 그러니 나를 좀 재워주시오.
프란치스코는 기꺼이 승락하면서 거지의 넝마 같은 겉옷을 받고 시중을 들었다. 불빛에 얼굴이 드러난 그 거지는 한센병이 심해서 두려움을 자아내는 모습이었다. 오랫동안 씻지 못했는지 지독한 악취가 났고 병 때문에 피부가 썩어 있었다. 그런 상태로 씻지도 않고는
- 내가 너무 추워서 그러니 형제님의 침대를 좀 써도 되겠소?
라고 말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기꺼이 침대를 양보하고 자신은 딱딱한 바닥에 누웠다. 잠시 후 거지는 다시 성인을 깨우며 말했다.
- 너무 추워서 잠을 잘 수가 없군요. 나를 좀 안아주실 수 있겠소?
성인은 악취와 더러움을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가 그를 안아 자기 체온으로 언 몸을 녹여주었다.
이 일화는 '다음 날 아침 거지는 홀연히 사라지고 방에 향기가 가득했다.' 라는 동화 같은 마무리로 끝난다. 성 프란치스코의 자애가 얼마나 지극했는지를 상징하는 설화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상대의 더러움이나 고약한 냄새가 거리낌 없는 것일까. 내가 프란치스코의 입장이라면 거지의 악취를 견딜 수 있을까. 그 거지가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이라는 확신이 있더라도 가능할까? 냄새를 견디는 정도를 넘어 기꺼운 마음과 표정으로 상대방이 감동할만큼의 다정함을 표현할 수 있을까.
노숙자들을 위한 무료급식소에서 밥을 퍼주는 어느 수녀님은 몇 년을 씻지 않은 것 같은 그들의 냄새가 아무렇지도 않은듯 손을 잡고 끌어안아 주었다. 중증 장애인 재활원의 어느 선생님은, 그들의 침냄새에 나는 굳은 표정을 풀 수가 없는데, 마치 후각을 잃은 사람처럼 환한 얼굴로 그들과 얼굴을 부볐다. 우리 시대에도 성 프란치스코들이 실존한다.
문득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을 떠올린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통제할 수 없지만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은 통제할 수 있다.' 현대 뇌과학의 비판을 받을만한 주장일 지 모르지만 저 모든 프란치스코들을 잘 설명해 주는 말은 에픽테토스 쪽이다. 그래서 가난의 냄새에 멈칫하는 나 자신에게 위선자라고 몰아붙인다. 감히 프란치스코처럼 되고 싶다는 기도를 올린다. 타인의 악취 조차 사랑할 수 있는 성인이 되고 싶은 어마어마한 꿈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그들의 모든 냄새도 사랑스러워지면 나는 천국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