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모욕감을 주거나 나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분노로 대응하는 편이 내 마음에 가장 손쉬운 보상을 선사한다. 상황을 이리저리 상상해봐도 야고보와 요한의 저 무시무시한 발언이 기겁할 만큼 놀랍지는 않다. 모욕적인 상황을 나나 내가 소속된 '우리'가 겪는다면 쉽게 그런 분노에 휩싸인다. 게다가 이 사건은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스승께서 당하신 모욕이다. 꼭 성격이 급하고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이와 유사한 상황에서 가만 두지 않겠다느니, 죽여버리겠다느니 하는 공격적 표현이 마음에서 일어나고 입 밖으로 튀어 나온다. 어떤 의미에서는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감정의 본질에 관한 현대 심리학자들과 신경과학자들의 연구는 우리가 직관적으로 관측해 온 그것과 상당히 다른 이해로 이끈다. 흔히들 분노의 크기는 사안의 중요도에 비례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너보다 내가 더 화가 났고 내가 더 억울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감정표출의지'에 비례한다.일단 분노에 사로잡히면 상대방이 표출하는 적대감보다 더 큰 분노를 표출하여 내 옳음을 증명해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은 생각에 빠진다. 내 분노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상대를 굴복시켜야하고 주변 사람들의 인정도 받아야한다. 그래서 내가 화내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뒷받침할 이유를 최대한 논리적으로 -논리력이 부족한 경우는 폭력이나 막무가내로- 지어내고 주장한다.(닉 채터, '생각한다는 착각' 참조)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을 큰 싸움으로 키우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 마음이 일단 분노로 방향을 정해버리면 그 자체로 분노가 분노를 낳는 악순환이 시작된다. 긍정적 감정이라면 이런 순환이 그 자체로 좋은 것이겠지만 부정적 감정은 점점 강력한 폭력과 증오로 변하고 심지어 전쟁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부정적 감정이 일어날 때 얼른 객관적인 태도를 되찾아야한다. 감정이 늘 적절하게 일어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매우 자주 착각하고 편향된 생각에 빠지며 내외적 자극에 속아 넘어간다. 사람들은 대개 옳고 그름 보다는 내 기분을 만족시켜주는 답을 선택하고 내 기분에 반하는 답은 배척하거나 무시한다.
'불사른다'는 무서운 표현까지는 아니더라도 분노는 우리 마음에서 자주 일어나는 감정이다. 사회 정의를 위해 분노할 수도 있고 개인적 감정이 폭발할 수도 있다. 상대가 틀렸다는 확신이 강할수록 그 분노도 강해지는데, 문제는 분노를 선택하는 순간부터 나는 옳고 상대는 그르다는 것을 인정받을 수 있는 근거에만 몰입한다는 점이다. 즉, 상대가 틀렸기 때문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가 강할수록 상대가 틀렸다는 확신이 강해진다. 나를 반성하고 돌아볼 여지는 더욱 좁아진다.
우리 마음은 기본적으로 자기중심적 시스템이다. 거의 항상 타자의 단면만 보고도 그가 어떤 성격이라고 규정해 버린다. 마치 내가 너 자신보다 너를 더 잘 안다는 듯이 평가하고 판단한다. 자기중심적인 사고의 시스템은 내가 최소한 평균 이상의 인격이라고 생각하는 편향을 낳는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도덕적 우월감'이라고 부른다. 나는 평균적으로 선한 의지로 살고 있는 편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떤 보상이 있어야만 선하게 행동하고 그렇지 않으면 이기적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견이다. (윌 스토, '이야기의 탄생', 애덤 그랜트, '싱크 어게인' 참조)
갈등이 시작되면 대체로 나의 정의로움은 하늘에서 불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해진다. 점점 더 상대가 무조건 나쁘거나 틀렸다는 확신이 드는데, 앞에서 말했듯이 옳고 그름을 떠나 십중팔구 객관적 판단이 아니다. 그 확신은 도덕적 우월감의 편향에서 온다. 논리적 귀결이 아니라 감정 때문이다. 그냥 화가 난 것이 저렇게 치달아간다. 그리고 무의식 중에 상대를 더 형편없고 비도덕적이며 어리석은 자로 깎아내리려는 목표를 세운다. 그렇게 해야 내 우월성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이 어이없는 오류를 자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심지어 자각을 하여도 쉽게 자기 실수를 인정하거나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감정이 이성보다 더 강하면서도 덜 복잡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 뇌는 자기 보호에 매우 충실하게 작동한다. 한 번 편향에 빠지면 거짓말이 또 거짓말을 낳듯 편향된 결정을 지켜주는 근거만을 골라서 선택한다. 내가 틀렸다는 것을 혹시 발견하면 무시하고 편향을 지지해줄 근거만 수용한다. 이른바 확증편향이다. 이제 갈등이 격해지고 상대의 잘못을 불살라 버리기 위해 내가 받은 모욕감의 몇 배를 되돌려주려 하고 때때로 그의 인격을 뭉개어 버리기를 서슴지 않기도 한다. 그때의 나는 악당과 전투 중이라는 자기암시로 사기충천해 있다.
마음을 지으신 예수께서는 편향에 빠진 제자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셨을 것이다. 분노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오히려 제자들의 마음속 모욕감에 있음을 아셨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분노의 불길을 단번에 꾸짖어 끄시고 돌아서 다른 마을로 가실뿐이다.
내 분노는 불의를 참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당한 모욕감을 참지 못하는 것인가. 설령 그 내용이 내 존재의 이유와 중요한 가치관에 관한 것일 지라도 분노의 감정이 일어날 때는 뒤돌아서서 꾸짖어보아야 한다. 나는 사랑의 사도로서 행동하고 있는가, 아니면 사소한 자존심을 정의로 포장하고 있는가.
말이 통하지 않는 어떤 완고함에 부딪칠 때, 내가 어떤 좋은 이야기로 설득해 보아도 상대의 고집만 강해질 때가 있다. 나를 무시하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은 내가 어떻게 완벽하게 말하고 행동해도 쉽게 그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 그들도 부정적 감정에 사로잡히면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나약하고 편향적인 인간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높은 지혜로 가르치실 때 그의 고향 사람들은 가르침에 놀라면서도 그분의 배경을 따지며 무시하기도 했다. 실력으로는 마음을 얻을 수가 없다. 논리와 토론으로도 마음을 얻을 수 없다. 설령 내가 논리적으로 완벽해도 상대의 마음을 얻을 수는 없다. 승리의 대가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니 똥 굵다.'라는 비아냥 뿐이다.
가끔 분노가 필요할 때도 있지만 그 안에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이미 정의가 아니다. 분노에 휩싸일 때 돌아서서 먼저 자신을 꾸짖어 보자. 내가 옳더라도 모욕감을 한 번만 꿀꺽 삼키고 잠시 다른 곳으로 가자. 혹시 악의적으로 나를 공격하는 느낌을 받으면 내 마음이 똑같이 악의적으로 대응하기 전에 차라리 그곳을 떠나는 것이 낫다. 아무 의미가 없다. 얻는 것은 '굵은 똥' 뿐이다.